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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제목 : 2003.1_아프간에서 희망을 보다(이광수) 4,543 - 조회
- 작성자이름 : 아시아연대  2005/01/20 - 등록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를 조사하러 떠나는 길

이광수(부산외국어대 인도어과 교수, 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자문위원)

<1>

내가 자문위원으로 있는‘외국인노동자인권을 위한 모임’(이하 ‘인권모임’)은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만든 부산에 있는 한 작은 NGO이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온 외국인 친구들의 인권에 대한 일을 주로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 고생을 하면서 손에 쥔 그 적은 돈을 가지고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어떻게 정착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인권이라는 게 한국이라는 특별한 구역 안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이로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권과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파키스탄의 아프간 난민촌과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게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우리는 이인경 인권모임 상담 차장, 강지원 카톨릭 부산 교구의 어린이 주일 학교 담당 신부, 이진원 평화방송의 프로듀서 그리고 교수이자 인권모임의 자문 위원인 나 이렇게 넷으로 구성된 자발적 팀이다.

작년에 이어 카톨릭 부산 교구의 주일 학교 어린이들과 인권모임에서 모은 후원금을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에 있는 아프간 난민촌의 교육 사업에 전달하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를 기획하고 조사하기 위해 떠난다.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왜 아프가니스탄을 도와주어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왜 우리여야 하는가 그리고 도우려면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조사하여 한국 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의 작은 세포들이 아프가니스탄 재건 사업에 연결되도록 하는 작업을 기획하고자 하였다. 물론 우리의 여정 가운데는 지난 2000년 부산의 허름한 공장에서 동물과 같이 일하다가 과로와 영양실조로 얻은 폐결핵으로 인해 불귀의 객이 된 파키스탄 청년 아슈라프의 가족을 돌아보기 위한 일도 자리하고 있었다.

2003년 1월 9일 방콕 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일이 순탄하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쪽도 넓게 보면 인도 문화에 속한 곳이라는 생각에 그리 긴장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아프가니스탄을 가기 위해 들러야 하는 파키스탄은 내가 전공하는 지역이라 거의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일은 의외로 파키스탄 비자 발급 받는 데에서 생겼다.

파키스탄 대사관에서는 우리가 NGO 활동을 하고자 한다는 사실에 짐짓 싫은 눈치였고, 여기에서 우리의 비자 발급은 사실상 거부당했다. 며칠간의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비자를 발급 받았고 그로 인해 파키스탄 정부의 아프간 난민촌에 대한 입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조사 일정 내내 내 생각을 혼동과 혼돈의 사이를 헤매게 하였다.

몇 차례의 줄서기와 왔다갔다를 하였을 뿐 우리는 파키스탄 라호르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총영사관에서 비자를 예상보다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여행객들은 비자를 거부당하는 것이 다반사고 심지어는 본국 사람들조차도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도 인도 사람들처럼 절차와 형식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그들만의 관료주의와 권위주의가 엄연한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유독 우리 NGO 활동에 대해 매우 우호적으로 대해주고 있었다. 우리로서는 감사하였지만 비자를 손에 쥐고 나서면서 얼마나 도움에 목말라 하면 이렇게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괜한 연민의 정이 들어 마음이 뒤틀리기까지 했다.

아프간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파키스탄의 북부 국경 도시 뻬샤와르에 설치되어 있는 구 난민촌에서 이루어졌다. 구소련이 침공을 시작하면서 생긴 아프간 난민은 뻬샤와르 주변으로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다. 그로부터 20년. 그들은 이미 파키스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가 아프간 난민이고 누가 파키스탄 사람들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인도 최후의 왕조인 무갈 왕조를 세운 사람들이 아프간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서도 이 쪽 지역에서의 민족 문제의 복합성과 그 유연함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형질학적인 인종은 물론이고 언어로서도 구별하기 힘들고 의식주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로서도 구별하기 힘들다. 우리 정도만 아닐까…. 대부분의 세계에 나타난 다민족 복합 문화 국가의 형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니 아파간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난민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라호르에서 뻬샤와르로 오는 도중 이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다만 단일 민족의 신화에 빠져 있는 우리의 눈이 그들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구 난민촌에서 만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내게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아니 아무런 충격을 받지 못한 것이 차라리 충격이었다고 하면 좀 과장된 표현일까? 우리가 처음 방문한 깟차 가리 난민촌은 문자 그대로 흙집으로 이루어진 난민촌이었다.

흙집을 처음 본 일행은 그 참담함에 고개를 저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흙집은 현재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농촌 가운데 가난한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거 형태로 경제 상태가 평균 이하이긴 하겠지만 참담함이나 처참함 등과는 분명 거리가 먼 상태임에는 분명하다. 더욱이 이 난민촌 안에는 상당수의 보건소도 있고 상당수의 학교도 있다. 먹고사는 것 또한 국내외의 NGO에서 나름대로의 후원이 있어 그런대로 최하 수준은 면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결국 이 난민촌 인도나 파키스탄의 빈궁한 여느 마을에 비해 그 복지 상태가 나으면 나았지 못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는 이 구난민촌을 소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부는 이미 철거하고 우리가 방문한 곳은 올 봄까지 소개할 계획 하에 있는 곳이었다. 이 난민촌이 소개되면 그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첫째는 파키스탄 내의 친지나 이웃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 사회 내로 정착하는 것이요 둘째는 지난 9.11 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 폭격 이후 조성된 국경의 신(新)난민촌으로 편입되는 것이며 셋째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많은 난민들은 파키스탄 사회 안으로 흡수되어 갈 것이고 이미 그 작업은 진행 중이었다. 그렇지만 깟차 가리 난민촌에서 만난 여 선생님 한 분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세계 각국 NGO의 도움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여학생들도 이곳에서는 기초 교육이나마 충실히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상태는 이보다 훨씬 열악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돌아갈 겁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돌아가서 그곳에 여학교를 세워 여자 어린이들을 가르쳐야 하니까요.”

아프간 사람들의 심정은 교실 앞 작은 공간에서 만난 어린이들의 노래 속에서 잘 읽을 수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던 어린이들은 붉은 스카프를 두른 평양의 어린이 같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연출한다는 게 다 그렇겠지만 특히 어린이들의 퍼포먼스 안에는 어른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었다. 비장함이 담긴 노래는 파키스탄 사람들로부터 받은 뜨거운 형제애를 그리고 조국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비장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소망을 담은 노래였다. 소망은 이루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나 가끔은 이루고 싶지 못함을 카타르시스로 풀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덧 그들은 파키스탄 사람들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순간 다민족 복합 국가를 이루지 못하는 한국 사회가 부끄러웠고 가난하지만 더불어 사는 파키스탄 사람들이 부러웠고 감사했다.

두 번째로 찾아간 샴샤뚜 난민촌은 더욱 더 정비되고 잘 운영되고 있었다. 보건소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매우 깨끗하고 나름대로의 기구와 약품을 비치하고 있었다. 어린이 놀이터도 있고 그 앞에 가꾸어진 꽃밭도 있어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하는 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

꼭 난민촌이라 한다고 해서 더럽고 피폐한 몰골을 띌 것이라고 기대하고 온 것이 혹 황색 저널리즘에 찌든 편견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해 보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나라의 사정상 이건 아니다 싶었다. 분명 어딘가에 문제가 있겠다 싶어 몇 마디 주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시설들을 이용하는 난민촌의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대답이 나온다. 벌이도 없고 배급받아 먹고사는 가난뱅이 인민들에게 질병이라는 것 자체가 호사스러운 것이라는 결론이다. 온 몸이 병들어 있고 그 병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아니고 약 몇 번 쓰고 치료 조금 한다고 나을 병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궁극적인 문제는 먹고 살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 줘야 하는 것이다.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야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 사람들이니 그들에게는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가 최소한의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 기준이자 그들의 시각이었다. 우리가 화두로 삼고 있는 인권이라는 것도 결국 또 하나의 우리 식의 호사일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곱씹어 고민하면서 난민촌을 무겁게 나왔다. 그나마 최근에 생겼다는 직업 기술 훈련 학교에서 가죽공일, 목공일, 양철공일 등을 배우는 나이든 사람들의 모습에서 희망의 언저리를 보았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름대로의 위안으로 삼았다.
  
남을 돕는 일 또한 일방적 시혜 차원에서 이루어지면 그 의미가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종교의 논리를 빌어 말하면 예수나 미륵과 같은 구세주나 미래불이 인간의 형태로 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 자체가 신의 방식이 아닌 인간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화두로 삼고 있는 인권이라는 것이 결국 이러한 방정식에서 풀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세계를 연구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난 후에 그들의 입장에서 세워 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권이 아닐까. 그 근간에는 사랑과 자비가 있어야 하겠지만 사랑과 자비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과 부대낌 속에서 찾은 인권이 진정한 인권이다.

구 난민촌을 조사한 후 우리는 밤늦도록 향후 한국 사회의 아프간 후원 사업 방향 설정에 대해 논의하였다. 고민의 요지는 구 난민촌은 나름대로 정착해 있으니 지원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소외당하는 자들에 대한 지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논의는 항상 미완으로 남겨두는 게 좋다는 생각에 일단 편견 없이 신 난민촌을 조사해 보고, 추후 계속하기로 했다.

<2>

신 난민촌은 9.11. 테러와 그에 따른 미국의 보복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아프간 난민들을 위해 세워진 수용 시설이다. 구 난민촌과는 달리 온전한 파키스탄 사회 내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 근처의 부족 지대(tribal area) 안에 설치되어 있어서 들어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부족 지대라는 것은 영제국 시대에 통치자들이 설정해 놓은 소수 부족들의 자치 구역인데 그 유산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파키스탄 정부보다는 그곳을 지배하는 군벌의 행정력이 우선으로 적용되고 있다.

다행히 출발 전에 우리의 후원 사업을 대행해주는 한 파키스탄 NGO가 미리 절차를 밟아 준 덕에 약간의 절차만 거친 후 어렵지 않게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무장 군인들이 우리 차를 호위하고, 가는 도중 곳곳에 총을 멘 군인들과 벙커, 성곽 등이 계속 눈에 들어 와 아프간 난민들이 파키스탄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네 시간 가까이 달려 바르깔리 난민촌에 당도하니 입구에 이 학교의 교실들이‘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인권모임’의 후원금으로 지어지고 있다는 간판이 세워져 있어 뿌듯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적은 양에 부끄럽기도 했다.

어둠이 깔리는 가운데다 방학중이라 아이들이 교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해 수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 사는 맛을 느꼈다.

교실은 우리 보기엔 건물이라 할 것도 없는 그냥 흙으로 바람막이만 해 놓은 공간일 뿐이다. 작년도 후원금으로 바르깔리 난민촌의 교실을 지었는데 올해의 후원금과 내년도의 후원금으로 다른 세 개 학교의 교실을 더 짓겠다 하는 설명에 가슴은 뿌듯했으나, 이 건물의 비막이 베란다 시설을 해달라는 학교 당국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무거운 마음이 한 동안 가시지 않았다.

바르깔리 난민촌은 흙집조차 없는 천막촌이다. 전체 넓이가 한국의 초등학교 운동장보다도 훨씬 좁은 공간에서 792 개 가족의 5506명이 거주하고 있다. 난방 시설도 없고 전기 시설도 없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방치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더욱 슬픈 사실은 그나마 이 상태가 아프간 본국보다 나아 아프간 난민 문제를 다루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적어도 당분간은 아프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의 홍보관 아유브 칸(Ayub Khan)씨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프간 난민들이 본국으로 귀환하고자 하면 유엔에서는 그들에게 이주비를 지원합니다. 이동 거리에 따라 두 당 10불에서 30불까지 지원하는데,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이주비를 받기 위해 난민들이 귀환을 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어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보다 풍족한 이주비를 주지 않는 겁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래도 여기에서는 학교도 있고, 보건소도 있고 정기적인 배급도 받으니 최소한의 생존은 할 수 있겠지만 아프가니스탄 본국에서는 그마저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아프간 난민들에 대한 세계 각국의 NGO들의 활동은 실로 대단했다. 우리가 지원하는 학교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면 우리가 학교 건물을 맡으면, 미국의 한 NGO는 교사들의 월급을 맡고, 프랑스의 NGO가 식수를 맡으면, 일본의 NGO는 문방구와 옷가지를 맡는 등의 역할 분담이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은 파키스탄 정부가 맡고 있다.

단지 땅을 내어주고 있다 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난민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든 이곳에 머무를 수 있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프간 사람들이 파키스탄 사회 내에 편입되어 들어오면서 양질의 노동력이 확보되고, 그들로 인해 교역이 활성화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외면하지 않은 그들의 인도주의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인자임에 틀림없다. 가난뱅이 파키스탄 앞에서 졸부인 한국이 부끄러워해야 할 점 아닌가?

도대체 아프간 본국은 어떤 상태이기에 이만도 못하단 말인가? 마음에 짐을 지우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 왔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전기가 들어오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는 게 죄짓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찾아간 꼿까이 난민촌은 철책이 둘러져 있어 기분이 심난하다.

행동을 제약한다는 의미는 없고 일종의 경계 표시로서 관리의 수월함을 위해 그렇다지만 너무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프가니스탄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굳이 뻬샤와르나 다른 도시로 이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고 그나마 약간의 마음이 놓인다. 난민들은 이곳에서 매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천막이 걷히고 그 자리에 흙집이 들어서고 있다. 군불 집히는 사람들도 보이고 찬거리를 사는 아낙들도 보여 사람 사는 살맛을 느낀다. 학교는 벽돌집으로 지어져 있고 학교 안에는 그나마 화장실도 갖추어져 있다.

마을 한 가운데 우리가 후원하여 세운 도서관이 서 있어 또 한 번 우리를 설레게 하였다. 아직 준공을 하지 못한 상태라 그들이 둘러앉아 신문이나 책을 읽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흐뭇해졌다. 학교가 세워지고 어린 아이들이 남녀 할 것 없이 교육을 받으니 문맹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 글을 읽는다 하니 어찌 흐뭇하지 않겠는가. 비록 단층의 사람 열 사람도 못 들어갈 만한 창고 같은 도서관이지만 그 안에 아프간 사람들의 희망이 싹트고 있어 뿌듯하였다.

아직 아프가니스탄 본국을 보지 않은 상태라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정도면 인도나 파키스탄의 가난한 농촌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못할 바 없으니 아프가니스탄 본국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논리적으로 수긍이 갔다. 하지만 도대체 아프간 본국은 어떤 상태이기에 이만도 못하단 말인가? 더군다나 한국 사회가 아프가니스탄 국가 재건이라는 거창한 프로젝트보다는 난민 특히 난민 어린이 교육이라면 더 많은 호응을 해 줄 것 같은 소박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어느덧 그들이 여기에서 계속 머무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소박한 생각은 다음날인 2003년 1월 15일 정오 무렵 아프가니스탄 국경 안으로 들어 와 카불을 향하는 차를 잡아타고 카이바르 고개를 넘으면서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카이바르 고개는 황폐 그 자체였다. 해발 6000미터 이상의 고개에 나무 한 그루 없는 모습은 거대한 먼지 덩어리였다.

돌 산 틈틈이 보이는 토치카, 도로 경계 표시로 사용하는 포탄 껍질, 총과 검문검색,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음산한 풍경 속을 끊임없이 질주하는 세계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의 배급 트럭들, 풀 몇 포기 자랄 수 있는 땅만 나오면 농사짓는 사람들, 왁자지껄 장사하는 소리 ... 누가 아프가니스탄을 처참하다 했는가.

국경 또르캄에서 중간 지점인 잘랄라바드까지는 도로 사정이 좋아 우리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왔는지 의심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이 있으면서 우리의 귀에 익은 잘랄라바드 부근은 다르다. 도로가 끊기고 부상자가 자주 눈에 띄어 전화의 흔적이 눈에 가득하다. 하지만 사람이 타고 다니는 것이라고 생긴 것은 다 길로 나오고 길거리엔 호객 하는 사람들에 거지에 개, 소, 말, 나귀까지 득실거려 전형적인 시골 읍내 풍경이다.

시내를 간신히 빠져 나오니 차창 좌우로 나타나는 하얀 색 칠을 한 돌로 이어진 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끝없이 반복한다. 지뢰 제거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 내게는 그 안에서 공동묘지 모습이 중첩된다. 하얀 색칠한 돌이 모여 있으면 공동묘지요 이어 있으면 지뢰선이니 결국 하얀 색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아프가니스탄 초입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희망을 보았다. 카이바르 고개는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한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난민들은 하루 속히 돌아가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몸서리치는 이 수많은 사람들을 버려두고 어떻게 그들만 정착해서 살아갈 수 없겠기에 그렇다. 돌아 와 조국 재건에 힘을 보태야 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겠지만 그 날은 하루 속히 와야 한다. 그리고 그 날이 속히 오도록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한다.

사람이라는 게 살아 있어서 사람이고, 인간이라는 게 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겠느냐는 내 말에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로 출발하지만, 인간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로 완성된다는 강 신부님의 화답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다. 그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찾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실크로드와 대승 불교의 정토 카불이 영국, 소련, 미국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의 각축장 카불과 중첩되어 혼란스럽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찾아 한국 사회로 가지고 갈 것인가?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가지고 이곳으로 다시 올 것인가? 무거운 마음에 밤을 뒤척인다.  


<3>

일제 중고 도요타 차를 잡아 탄 지 여섯 시간 후 날이 어두워지면서‘카불(Kabul)’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카불은 나타나지가 않는다. 분명 카불 안으로 들어 왔건만 카불 시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내 눈 앞에 '카불 호텔(Kabul Hotel)'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안은 불이 꺼진 채 아무 것도 없다. 도대체 큰 건물이 보이지가 않는다. 우리 숙소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아시아문화개발협력기구'라는 한국의 작은 NGO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 그곳 숙소에서 여장을 풀게 된다. 카불은 이렇게 어둠으로 내게 들어 왔다.

다음 날 2003년 1월 16일 카불의 아침은 복구의 희망으로 깨어났다. 23년간 계속된 내전에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융단 폭격이 겹쳐 온전한 건물보다 조각난 건물이 많은 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 그 박살난 건물 안에 둥지를 틀고 그 안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아낙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안에 생명력의 질김이 폐허 속에서 솟아나는 잡초보다 더 강하게 배어 있다.

아프간 사람들의 질긴 생명력은 곧 근면성으로 나타난다. 세계식량기구는 그들의 근면성을 잘 활용하여 매우 효과적인 아프가니스탄 원조 사업을 하고 있다. 세계식량기구는 사역을 위한 식량 제공(Food for Work)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을 원조하고 있는데, 하수 도랑을 치우거나, 빵 만드는 공장에 나가 일을 하거나, 과수원에 가서 일을 하여 자기 자산을 불리면 그에 상응하여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 결과가 애초의 예상치를 훨씬 상회하여 후원자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또 학교로 복귀하는 학생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지난해 학교 복귀 학생 수를 전년도의 3배 이상으로 되게 하는 등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현재 300만명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재적하고 있는데 특히 초등학교 1학년 입학 학생이 취학 대상 전체의 46%에 달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카불 곳곳의 담벼락에 그려진 학교 복귀 캠페인 그림이 바로 그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의 좋은 증거이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다른 어느 무슬림 국가들보다 여성 교육에 대한 열의가 더 강하고 문자 해득률은 이미 40%를 넘었으니 인도보다 더 나은 상태가 아닌가. 카불의 허름한 영어 교습 학원에는 청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교육에 국가의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의 근면성과 교육열은 한국의 상황과 매우 닮아 있다.

우리는 부족한 시간을 감안하여 일정을 계획대로 진행하면서 이동 중에만 카불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했다. 시내에는 유엔과 관련된 NGO 차량들이 눈에 많이 띄고, 눈에 띄는 건물 또한 유엔기구나 외국의 대사관 간판이 많다. 주로 샤르 이 노우와 와지르 아크바르 칸이라는 곳에 많이 몰려 있는데 그 곳 사이에 펼쳐 있는 도심 공원이 있어 놀란다. 이런 상황에 도심 공원이 유지되고 있다니.

도심 한 복판에서도 고개를 15도만 들어 사방을 둘러보면 산 중턱에 판자 집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 안에는 화장실도 없고, 상하수도도 없어 온통 분뇨와 쓰레기로 넘치니 다가오는 여름이 걱정된다. 도심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내외의 거리가 이렇다. 도심 안을 보면 큰 건물은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그걸 재사용하거나 조금 수리해서 사용하고 있다. 도로는 좁지만 그에 비해 차량은 많아 교통 체중이 심각하여 마비 수준이다. 당장에 나는 불편하더라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의 모습에 마냥 흐뭇하다.

지금 세계에서 원조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원조라는 것이 단순히 한 나라가 가난하다고 해서 해주는 것은 아니다. 원조는 정부의 능력이 한계에 부닥침으로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 해주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게 볼 때 원조 대상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나라로는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에이즈의 공포에 떨고 있는 남부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 그리고 전쟁의 폐허 위에 신음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등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북한은 우리 민족이자 우리 형제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많은 원조들이 국가적 차원에서든 NGO 차원에서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는 안타깝지만 우리로서는 힘이 부침을 느낀다.

거리도 멀고, 의료 보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축적된 노하우도 부족하고 그들과의 문화적 동질감도 그리 많지 않아 한국 사회에서 그들에 대한 관심을 끌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은 조금 다르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운데다 문화적으로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도 문화 전통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가 전쟁 폐허를 짧은 기간 내에 그리고 완벽하게 복구하여 경제적 기적을 이룬 신화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복구에서 개발로 나아가는 아프가니스탄을 돕는 주역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이다. 한국 사회 안에도 원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은 수도 없이 많다. IMF 사태를 극복하였다 하지만 홈리스들은 여전하다. 아직도 소년소녀 가장들은 파괴된 가족의 짐을 모두 진 채 허덕이고 있다. 그들을 돕는 일이 더 우선적이라는 논리에 대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하지만 그들에게는 정부도 있고 시민 단체도 있고 의로운 손길들이 끊이지 않아 그나마 최악의 상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아프간 사람들의 상황은 자립 복구하기에는 거의 절망적이다. 그런데 그들이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바로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일에.

우리 상황은 최근에는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그 정도나 방법에 있어서는 초보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올림픽은 10위권 안에 들면서도 해외 원조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를 못하다. 유엔에서는 한국을 급부상하는 원조국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그 성과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우리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많은 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우리가 이렇게 일어서기에는 우리의 근면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그들의 원조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국제 정치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도덕적 차원에서도 우리는 세계의 이웃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원조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가능하다. 첫째는 아프가니스탄의 기반 시설 복구에 대한 것이다. 도로 건설, 전기 시설 확충, 댐 건설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비용이 막대하여 현재 우리의 여력으로서는 어려운 부분이다.

둘째로는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구조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전환하여 확실하게 자리 잡는데 필요한 비용을 대는 것이다. 이 또한 현재의 우리 실정으로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 두 분야는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우리가 기여를 할 수 있는 분야는 세 번째의 인적 자원 육성과 긴급 복구 지원에 관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특히 학교 교육이나 직업 훈련 교육에 있어서 우리는 원조 수혜국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긴급 지원에 관해서도 한국 사회는 상당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매우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원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는 정부를 통한 원조이고 또 하나는 비정부 기구 즉 NGO를 통한 원조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서는 세계 각국의 NGO들에게 NGO를 통해 원조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로 창구를 일원화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중복 투자를 막아야 하는 점도 고려하고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하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에 반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계 각국의 NGO들은 그들 공무원 사회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NGO들은 NGO를 통한 원조 방법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정부는 정부대로 하고, NGO는 또 NGO대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정부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공무원들을 교육시킨다거나, 직업 학교를 세우는데 필요한 체계나 관련 법규를 정비해주거나 구호 물자를 보급해주는 일을 맡고 있다. 그리고 NGO들은 정부에서 하기 어려운 부분에 뛰어들어 소기의 성과를 내고 있다. 그들은 오지에 들어 가 기아 구제, 초등 교육, 식량 증산, 식수 보급 시설 확충 등의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일은 정부보다는 일에 더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NGO가 맡는 게 더 낫다. 특히 그들은 현지 접근에 강점이 있고 주민과의 일체감 조성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고, 현장에서 사후 관리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절실한 문제에 바로 접근할 수 있어 더욱 안성맞춤이다.
  
지금 세계는 아프가니스탄을 잊어 가고 있다. 미국이 행한 만행이 몇 년 사이에 옛날 이야기로 되어 버렸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들을 벌써 잊기에는 그들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이라크 폭격이라도 발생한다면 세계의 이목은 이라크로 몰릴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 이란, 타지키스탄 등으로 피난간 난민들이 서서히 본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본국은 아직 그들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우리가 그들을 원조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 돈 1만원이면 어린이 한 사람 한 달 식량이 해결된다. 23년간의 전쟁과 4년간의 가뭄 속에서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고 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이 그들에게는 거대한 희망이 됨을 잊지 말자. 세상이 아직 살만함을 우리가 한 번 보여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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