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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연대
Subject  
   국경과 ‘사선’
국경과 ‘사선’
[비자 없는 세상 73] 카슈미르(10)

2006/9/26
이유경 기자 penseur21@hotmail.com

“학교 어디까지 나왔냐?”는 인도 이민성 직원의 마지막 질문을 뒤로 하고 그날의 일 번 타자로 국경을 넘었다. 들어선 파키스탄 영토에서는 붙들고 말 거는 직원도 없고 모든 도장도 빨랐다. 응시 당하는 게 여전히 괴롭지만 한편으론 익숙해진 내게 잘 정돈된 녹색 도시 이슬라마바드는 편안했다. “여자는 금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슬림 남성들은 여성을) 쳐다보아서도 안 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아시야의 말만 빌자면 이곳 무슬림들은 ‘진짜’가 분명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주도 무자파라바드로 오르던 날, 거리의 병사들이 질문을 해대면 뭐라고 대꾸할지 잔뜩 생각해 놓았건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사실 ‘유니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대신 사복이 깔렸다!) 지난 해 대 지진 이후 밀려든 국제 엔지오의 활동으로 외국인도 허가 없이 닿을 수 있게 된 이 땅은 ‘아자드(‘자유’라는 뜻) 카슈미르’로 불린다. ‘점령 카슈미르’(Occupied Kashmir : 인도령 카슈미르)를 ‘해방’시키기 위한 ‘베이스’로 ‘공식’ 간주된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이르기까지, ‘스리나가르-자무-델리-암리차르-바가-라호르-이슬라마바드-무자파라바드’ 내가 밟은 이 코스는 밤낮 이동만 해도 최소 일주일짜리다. 나와 달리 ‘사선을 넘어’ 쯤 되는 ‘영화’를 찍으며 넘어온 이들, 그들은 평균 4-5일이 걸렸단다. 통제선(LoC : Line of Control)을 넘어 온 이들의 얘기다.

대부분이 쿠파라, 바라물라 등 통제선과 가까운 지구(district)에서 넘어왔고 이건 반나절에서 하루 코스지만 낮에는 숲에서 숨어 지내다 밤에만 이동하느라 오랜 시간을 채웠다. 스리나가르에서 무자파라바드까지 110km. ‘평화버스’를 타면 네 다섯 시간이 족한 이 땅을 많은 이들이 이렇게 돌고 돌아 이동한다. 군과 무장세력 사이 샌드위치 신세를 견디다 못해, 혹은 인도 군의 잔인함에 기겁하여 가족을 남겨둔 채 통제선을 넘어온 ‘자발적’ 이산가족들. ‘인도 보다 더 나쁠 순 없다’는 약한 기운에서부터 ‘해방구’라는 환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을 품고 그들은 ‘일단’ 넘었다.

‘사선’을 넘는 사람들

“히즈볼 무자히딘 전사 세 명이 도와줬어, 안 그러면 이 몸으로 어찌 왔겠어” 휠체어 청년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많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제 아무리 그들이 통제선 넘는 선수들이라지만 자파르(가명, 28)가 넘은 챠코띠(Chakothi) 보더는 만만한 구역이 아닌지라 무자히딘으로서도 대단한 모험을 한 셈이다. 자파르는 인도 군에 두 번 끌려가 고문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다리 불구가 되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산다. 어느 날 그의 마을을 들락거리던 무자히딘 전사들이 제안했다. 같이 가자! “당신 한 번 더 끌려가면 죽어 나올지 몰라” 92년 여름 걷지도 못하는 이 장애인을 들고 업고, 네 명은 그렇게 사선을 넘었다. 도착 후 히즈볼 무자히딘 ‘사무실’에서 약 한 달을 보낸 뒤 그는 마낙파얀(Manakyayan) 캠프로 보내졌다. 2년 후 그의 부모와 남은 가족 4명 역시 통제선을 넘어와 우여곡절 끝에 가족상봉까지 한 그는 대단히 운이 좋은 경우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수 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2002년 9월 14일 남편과 함께 통제선을 넘은 파타마(가명, 35)는 인도 군에 강간당하고 풀려난 열흘 후 바로 넘어버렸다. 통제선에서 불과 4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쿠파라 지구 카르나 마을출신인 그녀는 남편이 끌려간 그날 오후 아타리 (Attari) 소령에 의해 군부대로 끌려가 군 캠프에서 경찰서로 다시 군 캠프로 15일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경찰은 먹거리를 주었지만, 군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대신 구타와 강간으로 한 인간을 말살시켰다. 남편과 여섯 아이 그리고 그녀의 몫까지 월 8천 루피를 받아 살아가는 파타마는 그 악몽의 공간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살만하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지뢰밭인 통제선 구역을 지나다 기어이 지뢰를 만나 한쪽 다리를 잃은 압둘 아지즈(Abdul Aziz, 37)는 92년 고향 쿠파라를 떠났다. 그날 새벽 4시, 인도 방향 통제선 2km 지점에서 지뢰가 터져 다리가 잘렸다. 그러나 인도 군이 달려올 까 약 9시간을 앞 만보고 ‘달렸다’. 동행자 4명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산송장이 되었을 거라는 아지즈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잃지 않았다”며 당시 고통의 정도를 ‘잔인하게’ 묻는 내게 담담하게 말한다.

석 달간 무자파라바드에서 무료 치료를 받은 후 난민촌에 정착해 살고 있다. 목숨을 걸었고, 다리를 잃었지만, 아지즈는 이곳에서 아내와 네 자녀를 얻었다. 지금은 구멍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인도로부터의 독립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인도 혹은 파키스탄 편입 두 가지 선택만 주어진다면 ‘무슬림으로서’ 파키스탄에 조인하고 싶단다.

90년도에 400-500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집단 이주한 라이캇은 경우는 그의 마을이 목격한 잔인한 살해 장면의 충격에서 왔다. 90년대 초반 쿠파라 지구 라스닷 하이야마 마을에 들이닥친 국경수비대(BSF)는 무장세력 수색하겠다며 마을 주민들을 인근 산으로 끌고 갔다. 항의하던 라이캇의 사촌 두 명은 팔과 다리가 잘리고 눈알이 빠진 채 죽어갔고 공포의 도가니에 빠진 마을은 가가호호 대표 100여명이 회의를 한 끝에 집단 탈출키로 결의했다. 허약한 노인 3명의 죽음을 보았지만 대부분은 무사히 건넜다. 90년도에는 통제선 상황이 지금처럼 삼엄하지 않았다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심정으로 각오하고 넘었다고 리아캇은 회상했다.

이렇게 사선을 넘어온 통제선 난민들은 아자드 카슈미르 영토에 최소한 3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89년에서 91년 사이 넘어온 난민만 공식통계 29,932명이다) 이들이 통제선을 넘자마자 처음 만나는 건 파키스탄 군의 ‘웰컴!’. 일정한 절차를 거쳐 난민캠프로 보내진 이들은 정부로부터 매월 일인당 천 루피(한화 약 1만 6천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3백 루피에서 최근 오른 액수다) 자녀가 많은 이들은 그 수만큼 천 루피씩 더 받는다. “난 비록 독립을 원하지만 파키스탄이 주는 그 천 루피가 눈물 나게 고맙다”는 리아캇 알리(Liaquat Ali, 35)의 말은 두 나라를 경험한 이들의 정서 한 켠이다.

인도 군의 폭력에 대비되는 파키스탄의 ‘초기 환대’가 이들을 ‘사로잡았음’은 부인키 어렵다. 그러나 파키스탄이 이 난민 물결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 납치, 실종, 고문 등 파키스탄 전역의 열악한 인권환경이 아자드 카슈미르에서도 예외가 아닌지라 저쪽에서 ‘피해온’ 그러나 이쪽에서도 ‘피해갈 수만은 없는’ 현실에 난민들이 노출되어 있음은 이를 잘 말해준다. 더욱이 난민들의 특수 처지를 이용하고 있는 정보국 ISI(Inter Service Intelligence)의 행태는 파키스탄의 ‘진짜’ 얼굴을 들여다볼 중요한 지표다.

바그(Bagh)지구 주민 굴람(가명, 35)은 91년 9월 통제선을 넘어온 일용직 노동자다. 그는 ISI 코틀리(Kotli) 사무실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왔고 “나중에”라고 조건을 붙이며 피해왔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지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난 달 10일 오전 10시, ISI 직원이자 은퇴군인 사카왓 샤(Sakhawat Shah) 등 3명이 급기야 집으로 찾아 들어 굴람을 캇커르(Katker)타운 사무실 눌 소령에게 데리고 갔다. “당신 우리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 우린 권력이고, 말 안 들으면 ‘인도 스파이’로 찍어 종신형에 쳐 넣겠다” 눌 소령은 협박했다.

그로부터 14일까지 독방에 갇혀 있던 굴람은 28일 다시 오겠다는 종이에 사인 한 후 풀려났다. 28일 오전 다시 눌 소령을 찾아갔고 독방에서 하루 감금된 다음 날 29일 오전, 그를 태우 차는 어딘가로 이동했다. 오후 3시경 바그 (Bagh) 중심가에서 교통체증에 걸린 틈을 타 그는 극적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계속 도망 중이다. 다음 날 정보국은 그의 아버지(70)를 연행해 취조했다. “당신 아들 우리한테 걸리면 사망이야. 최소한 (두) 다리 몽둥이는 부러질 줄 알아!” 아버지는 그 협박을 품고 열흘 만에 풀려났다. 스파이 제안에서 살해협박으로 이어지는 굴람의 사례는 드물지 않은 한 유형이다.

최근 휴먼라이츠워치가 발표한 인권보고서 역시 이곳 통제선 난민들의 인권상황을 잘 기록하고 있다. 지난 해 4월 7일 평화버스가 처음 운행되던 날을 전후로 발생한 인권침해 사례는 눈 여겨 볼만하다. 이산가족인 난민들이 버스운행을 대 환영하는 건 당연했고 난민과 전 무장세력들(그들 역시 사실상 ‘난민’이다)로 구성된 자무카슈미르운동연합(JKUHM) 본부는 여러 다른 난민들과 함께 첫 번째 도착할 버스에 대한 환영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6일, “당신들의 버스 환영은 허용할 수 없다!” 8명의 활동가들은 그런 말을 들으며 경찰에 연행된 후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우린 파키스탄 정부의 정책을 지지한 건데 그것도 허용이 안 된단 말인가?” 당시 고문당했던 자밀 미르자(Jamil Mirza)의 물음이다. 한때 두 팔 벌려 환영 받았던 통제선 난민들. 모국영토에서 난민이 된 이 자발적 이산가족들을 파키스탄은 더 이상 환영하지도, 이미 ‘정착한’ 이들의 인격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더 이상 ‘환영’은 없다

9.11 이후 급변하는 정세 역시 통제선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2001년 10월 12일 월경 테러리즘을 금지한다고 강력 선포했고 이에 인도는 통제선을 따라 720km에 이르는 구역에 특수 탐지기, 철조망, 전자 충격기 그리고 35만 군을 배치했다. 비록 지난 해 대 지진으로 이 울타리들이 파괴되고 무장세력들은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넘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 나오고 있지만 민간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사선이다. 통제선의 또 다른 ‘주연’인 무장세력에게도 이런 변화는 분명 타격이다. 무장세력 연합체 지하드 연합(UJC)의 의장인 사이드 살라우딘은 “울타리 이후 무장투쟁이 약화되었다”며 인도의 조처를 묵인한 파키스탄 정부에 비판을 쏟아낸 바 있다.

스리나가르 베이스의 ‘신앙의 딸’ 의장 아시야 역시 “파키스탄 정부의 카슈미르 정책변화는 무장투쟁에 큰 타격”이라며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배신했듯 카슈미르도 배신했다”고 분개했다. 맞다! 급변하는 국제환경에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무장투쟁이나 난민문제 ‘따위를’ 유념하며 정책구상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오산이다. 22일 무샤라프 대통령이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폭로’한 게 사실이라면 9.11 직후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하지 않으면) ‘석기시대로 돌아갈’ 폭파위협을 당할 만큼 자국의 운명이 하늘하늘했고 그 운명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본질적으로 따져보자. 앞서 아지즈의 ‘무슬림으로서 파키스탄 편입 동의’ 라는 말이 암시하듯 친 파키스탄 정서의 바탕은 사실상 종교적동질감이다. 파키스탄 편입 지지파로 분류돼온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 자마떼 이슬라미(Jamaet-e-Islami)도 어느 쪽으로도 편입을 거부하는 ‘독립파’ 민족주의 정당 자무카슈미르민족해방전선(JKNLF)도 주장은 다르지만 ‘파키스탄 편입’의 근거를 ‘종교’로 분석하는 데는 차이가 없다. 그리고 파키스탄과 일부 정당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종교근본주의에 불 붙이며 카슈미르 민족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

잠시 옆 나라를 보자. 80년대 소련의 아프간 침공 전쟁 당시 지하디 전사들을 모집하고 먹이고 훈련시키고 제공하고. 대소 항쟁을 냉전시대 대리 전으로 이용하며 이슬람근본주의 무장세력을 키웠던 미국은 이렇게 내 걸지 않았던가! “우리 ‘믿는 사람들’(Believers)이 힘을 합쳐…(무신론자 공산주의자들을 대항하자!)” 종교의 경계까지 뛰어넘었던 이 웃기는 프로파간다의 정체는 지금 테러와의 전쟁이 잘 말해주고 있다. 다시 카슈미르. 점령세력의 힘을 빌어 또 다른 점령세력을 대항해 벌여온 카슈미르 투쟁이 언젠가 터질지 모를 지뢰노선을 밟아왔다면 너무 가혹한 판단일까. ‘점령세력에 기댄 해방투쟁’이라는 모순은 ‘지원’이 사그라든(?) 요즘 오도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듯 하다. 그 ‘투쟁’ 과정에서 최대희생자였던 통제선 난민들은 저쪽에서는 국가테러리즘격 폭력에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령에 고단하기만 하다. 도망자 굴람처럼, 그들은 지금 또 다른 ‘사선’을 두리번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무자파라바드 / 바그= 이유경 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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