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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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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강점 60년 기획 특집
미군강점 60년 기획 특집
한국민권연구소에서는 2005년 미군강점 60년을 맞이하여 기획연구 주제를 정하고 그 결과물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Ⅰ 미국의 세계전략

1. 미국의 세계전략, 부시행정부의 세계전략, 동북아전략(연재끝)
2. 미국의 한반도 전략(연재끝)
3. 미국의 북한 붕괴 계획 및 한반도 전쟁계획

Ⅱ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1. 침략과 학살의 미국건국사(연재끝)
2. 전쟁국가 미국의 정치경제적 기초와 대외정책사(연재중)
3. 미국의 사회문화
4. 미국의 제3세계침략사
5. 패퇴해가는 미국, 몰락해가는 미국


Ⅲ 우리민족과 미국

1. 우리 민족 대 미국의 대결 100년사(연재중)
2. 미국과 한국사회
3. 이북과 선군정치
4. 21세기 우리민족과 미국의 대결은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Ⅳ 주한미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1. 주한미군 주둔 목적에 대한 본질적 이해(연재끝)
2. 주한미군 주둔 관련 한-미 간의 협정문 검토(연재끝)
3. 주한미군 철수의 당위성과 절박성(연재중)
4. ‘한미동맹’ 현황
5. 주한미군과 한반도 평화 문제
6. 주한미군 철수

미군강점60년 기획특집


탈냉전시기 미국의 대외정책
: 전쟁국가 미국의 정치경제적 기초,
냉전~탈냉전 시기 미국의 대외정책 완결편


박종식 / 한국민권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차례
  1. 탈냉전시기 미국 패권의 위기상항
  2. 변함없는 미국의 침략정책
   1) 침략 명분의 변화
   2) 탈냉전 시기 대표적인 침략전쟁
     ① 파나마 침공(1989년)
     ② 이라크 침략(걸프전쟁-1991년)
  3. 부시 행정부 시기의 대외정책
  4.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대외정책
   1)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대외정책 기조와 목표
   2) 대외정책을 보장하기 위한 미사일방어체제
  5. 연재를 마치며
    <별첨> 참고문헌

[전쟁국가 미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라는 주제를 통해 전쟁국가 미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는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것을 서술하였고, [냉전시기 미국의 대외정책] 연재글을 통해서는 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밝혀보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자유경쟁과 경제의 무정부성․무계획성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근원적 한계로 인해 발생한 1차 세계대전 시기 전시경제체제에서 시작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복구 기간 독점자본세력과 국가기관의 유착이 공고화되면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안정되고 강화되어왔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① 국가권력과 독점자본세력과의 유착 ② 독점세력들에 의한 국가기구의 장악 ③ 군수산업의 육성(군산복합체의 육성)을 본질적 특성으로 운영된다.
그러한 특징을 갖고 형성․발전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미국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미국은 이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방향에서의 대외정책을 수립․실행한다. 냉전시기까지의 미국의 대외정책은 미 제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침략과 정복, 봉쇄와 종속이라는 제국주의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낸 것이 각 행정부 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고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소련의 붕괴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가져온 탈냉전시기에도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수단과 방법에 있어 더 교활해지고 간교해지는 것이다.
탈냉전시기의 미국의 대외정책은 어떠한 방향으로 수립되고 실행되는 지를 서술하면서 큰 틀의 두 주제에 대한 연재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1. 탈냉전시기 미국 패권의 위기상황

미국의 패권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전쟁 후반기인 1970년대 초반부터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래 지속되어 오던 미국의 세계적 패권이 뚜렷이 위협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이다. 1983년 이후 1991년까지 레이건․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재정 적자가 매년 평균 2,000억 달러에 이르렀고, 게다가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일본과 서유럽으로부터 외채를 빌리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미국 정부의 대외 채무 총액이 대외 채권 총액을 상회했다. 레이건 이전의 역대 행정부 시대에 누적된 대외 채무액은 1조 달러였는데 1981년 이후 가속화된 교역 및 재정 적자로 인해 미국의 대외 채무는 1986년에는 2조 달러, 그리고 1990년에는 3조 달러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냉전시기 소련에 대한 봉쇄와 제3세계 반제민족해방 혁명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침략에 소요된 엄청난 국방비 지출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스타워즈(전략방위계획-SDI)’라는 허황된 방위계획을 수립하여, 매년 3,000억 달러를 투입하여 추진하였던 레이건 행정부 때의 무분별한 무기개발을 들 수 있겠다. 이렇게 미국 패권의 위기상황을 초래할 정도의 경제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때의 막대한 군사비 투자 및 지출을 보면 미국의 정치경제적 기초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최악의 경제상황에서도 미국의 국방부는 미국 경제의 가장 큰 소비자였고 [군산복합체의 이익=미국 경제의 이익]이라는 미국경제의 속성상 군사비를 높일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져 연방정부는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 군수산업, 군수산업과 관련된 이익을 갖는 의회 내의 정치 세력들 간의 합종연횡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미국의 경제는 타국을 침략하지 않고는 자력으로 발전하기 어려운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2. 변함없는 미국의 침략정책

1) 침략 명분의 변화

미-소 중심의 냉전시기가 지나고 탈냉전이 도래했다고 해서 ‘평화의 시대’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오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미 제국주의의 본질인 침략적 속성을 보지 못한 오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이 끝났다고 해서 침략을 통한 ‘종속과 정복’정책은 변하지 않았고 미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소 냉전의 붕괴는 침략을 위한 새로운 명분의 변화가 필요했다. 소련 몰락 이전에는 모든 반제민족해방 혁명세력을 ‘악의 제국’ 소련의 지원을 받은 세력으로 규정하고 침략․내정간섭을 하기에 별다른 지장이 없었지만 소련의 몰락은 그러한 명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즉, 침략을 위한 새로운 구실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국제 테러리즘, 마약거래, 위조화폐, 비민주주의국가, 비인권국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성, 핵확산 및 전파 국가 등의 구실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명분들을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구실을 변형하여 여론을 호도하고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치밀한 노력에 따라 ‘악의 제국’ 소련은 ‘불량 국가(rogue states)’ 아랍국․이북으로 대체되었고, 미국은 악마의 우두머리를 제거하고 다른 악마들을 처치하러 나선 것으로 선전되었다.

이와 같은 조작들을 통해서 미국의 침략행위는 계속되었는데, 카다피를 수반으로 하는 리비아는 위의 조작된 명분들의 대부분을 걸어 ‘악의 국가’로 만들었고, 그레나다는 미국의 해상수송선을 봉쇄하고 쿠바가 건설한 공군기지로부터 미국에 폭격을 가하려 한다는 구실이 생산되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국경선 넘어 혁명을 수출했으며 텍사스에 침입하려 한다는 구실이, 또 파나마의 노리에가(Noriega)가 콜롬비아의 마약조직을 이끌고 미국인을 독살하려 한다는 구실이 생산되었다. 또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뜻을 어기자 ‘바그다드의 짐승’으로 낙인찍힌 것 등이 이러한 노력의 예이다.

2) 탈냉전 시기 대표적인 침략전쟁

(1) 파나마 침공(1989년)

탈냉전 시기 미국 대외정책의 추세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파나마 침공과 걸프전쟁이다.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어 동유럽에서의 냉전의 기운이 가시고 있고, 부시-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으로 소연방의 해체가 확실시되는 시점에 부시는 파나마를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파나마는 미국의 중미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였다. 니카라과와 쿠바의 반제민족해방 정권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또 중미지역의 정보공급원으로 파나마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노리에가의 파나마는 니카라과의 민족해방세력인 산디니스타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귀중한 동맹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8년 노리에가가 미국으로 마약을 밀반입하려다 적발되자 공화당 정권과 유착되어 있는 사실이 폭로될 것을 염려하여 사전 제거 차원의 침략을 한 것이다. 파나마 침공은 냉전시대가 끝나도 반공이 아닌 다른 명분을 걸어 해외 침략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라크 침략(걸프전쟁-1991년)

파나마 침략은 미국이 자신의 뒤뜰로 여기는 중미에 이상이 생겼을 때는 여지없이 개입을 통해 해결해 나갈 것임을 보여 주었던 사건이었다면 이라크 침략은 미국 패권유지의 기본 축인 중동에서의 이익에 도전이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냉전시대 미국의 중동정책이 지속됨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라크의 후세인이 수 천 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할 때에도 이라크는 미국의 충실한 우방이자 교역 상대였다. 1980~88년의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도 이라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89년에도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라크가 미국의 이익에 있어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반미성향의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그러하였고, 세계 2위의 석유 생산국인 이라크는 미국 기업들에게 엄청난 시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동지역에서의 반제민족해방세력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은밀히 지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 이라크가 미국의 요구에 불복종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사담 후세인은 하루 밤 사이에 ‘괜찮은 정치인’에서 ‘악마의 화신’으로 둔갑했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의 후세인을 그대로 방치하면 중동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축소될 것을 우려하여  외교적인 해결방안을 신속히 봉쇄하고 즉각적으로 침공했다.

이렇듯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미국의 이익에 득이 되면 독재자를 지원하고 대리정권으로 두는 미국의 전통적 정책과 미국의 이익에 반하면 어떠한 성향의 정권이라도 전복한다는 미 제국주의의 본질이 탈냉전시기에도 변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부시 행정부 시기의 대외정책(1989~1992)

냉전이 끝나고 탈냉전이 도래했다고는 하나 미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에서 서술하였다. 하지만 냉전시기 무한군비경쟁으로 인한 미국의 경제적 난관은 효율적인 대외정책으로의 수정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냉전의 쇠퇴가 국내적으로 국방비 감축의 여론을 상승시켰고, 의회 내에서는 국제 문제에 대한 개입보다는 국내경제 활성화를 도모해야 된다는 ‘고립주의자들’ 입김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여 당시 체니 국방장관과 파웰 합참의장은 걸프전 도중인 1991년 상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하여, 1992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안과 미 군사력을 1990년 수준에서 25% 감축하려는 중기 군비계획안을 제출했다. 이 계획안에서는 1995년까지 18개 육군사단을 12개 사단으로 줄이고, 36개 전투 비행단을 26개로 줄이며, 546개 해군선단을 451개 줄이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냉전의 해체로 인한 비등해진 평화에 대한 여론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국방예산의 감축안을 제시하긴 하였지만 추가삭감의 여론을 무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군산복합체라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 운영되는 미국경제의 체제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부시행정부는 ‘지역적 균형자(Regional Balancer)’라는 전략개념을 통해 미국의 적극적 안보역할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새로운 상황이 도래함에 따라 군사력의 구조를 개편해야 하지만 미국의 군사력과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중하게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딕 체니 국방장관은 1991년 국방부 연례보고서에서 “전략 환경이 변함에 따라 미국은 핵무기와 재래식 군사력 구조를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감소시킬 수 있게 되었지만, 내일의 도전에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군사력은 유지해야 한다. …… 미국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익을 보호하고 국제상황을 형성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이하로 내려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부시 행정부가 1990년 의회와 합의한 20~25%선을 넘어선 국방예산 추가감축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미국 경제의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면서도 미국의 정치경제적 기초인 국가독점자본세력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나온 세계전략개념이 탈냉전시기 미국의 대외정책의 골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1992년 국방부 보고서를 통해 알려진 탈냉전시기 미국의 전략과 정책기조는 다음과 같다.
① 아시아와 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을 보장한다.
② 강력한 쌍무적 안보동맹체제를 유지한다.
③ 적정하면서도 강력한 미 군사력의 전진배치 전략을 유지한다.
④ 미 군사력 전진배치를 뒷받침할 충분한 해외기지구조를 유지한다.
⑤ 아시아 동맹국들이 방위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맡도록 한다.
⑥ 보완적인 방위협력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탈냉전시대에서도 냉전시대 대소 봉쇄정책을 뒷받침한 미국 주도의 안보동맹체제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며 지속시키고 있다. 미국은 이제 지역적인 차원에서 고유하게 제기될 수 있는 위협을 ‘지역적 비상사태’로 개념화해서 이에 대처하는 것을 냉전시대의 대소봉쇄를 대신한 새로운 안보정책 목표로 확립했다. 또한 세계 주요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을 ‘지역적 균형자’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했다. 미국은 이렇게 자신의 안보전략의 정당화 개념을 대체했지만, 그 안보전략 자체는 ‘동맹체제’의 지속과 ‘미 군사력 전진배치’라는 형태로 근본적인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4.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대외정책(1993~2000)

1)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대외정책 기조와 목표

1기 클린턴 행정부는 과거 부시행정부의 새로운 외교정책을 지침으로 봉쇄정책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외정책적 지침을 마련하였다. 이는 제국주의의 침략과 약탈 본성을 실현하려면 탈냉전시기에도 새로운 적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미국의 탈냉전 시기의 국제적 위기를 조장한다.
「냉전의 해체로 인해 미-소간의 전쟁위협도 없어지고, 인류의 전멸 또는 공멸을 수반하는 ‘상호확증파괴(MAD)’의 공포도 감소되었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잔존요소와 새로운 시대적 안보위협 등이 뒤섞인 복합적 위협요소들이 미래의 불확실성과 더불어 여전히 도전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대량살상무기를 소유․전파하려는 세력․국가가 존재하고 있고 그로인해 심각한 위기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민족간 종교간 분쟁으로 인한 지역적 분쟁위험성, 테러리즘의 확산, 마약 조제․유통 세력의 조직화 등이 새로운 세계질서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며 현재의 세계를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 세계로 규정한다.
그 결과 1994년에 ‘확산정책’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출현하였고, 곧이어 ‘개입정책’이 추가되어 ‘개입과 확산’이라는 개념이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적 기조로 등장하였다.
‘개입정책’이란 미국의 안보 및 경제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해서 적극 개입한다는 개념으로, 미국과 이미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나 지역에 대해서는 기존 동맹관계를 재확인 또는 강화하며, 현재 해외 주둔하고 있는 미군사력과 미군기지를 계속 존속시키려는 정책이다. 이는 유럽이나 동북아, 중동 지역에 미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유지․강화시킴으로써 미국의 이익에 해(害)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시 즉각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고자 함이다.
‘확산정책’이란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주의를 세계적으로 확산하겠다는 개념으로,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전 세계 정치․경제․문화적 가치를 미국식 가치로 즉, 미 제국주의적인 체제로 변환․복속시키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있는 정책이다.

다시 말해서, 1기 클린턴 행정부의 ‘개입과 확산’이라는 대외정책의 주요목표는 (1) 기존의 제국주의 동맹국 또는 친미예속 지역정부들과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견지하면서 군사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겠다는 것. ① 그리하여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제압하고, 핵무기,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 무기의 통제 및 비확산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② 중동지역과 아시아지역에 존재하는 반미성향의 국가들(이란, 이라크, 리비아, 이북 등)과의 전쟁이 발발했을 시 단계적 승리(Win-hold-Win전략)와 동시에 승리(Win-Win 전략)할 수 있는 군사력 유지 ③ 테러리즘, 마약, 국제조직범죄(미국의 이익에 따라 육성․지원되기도 하고 필요가 없어졌을 때 ‘악의 세력’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등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국지적 분쟁과 위기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함이다.
(2)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체제 강화를 통해서 미국의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겠다는 것. ① 양자, 지역, 다자협정을 통해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을 각개 격파하여 세계적 흐름으로 만들겠다는 것 ② 미국에 대한 경제의존성을 증대시켜 미국의 경제정책에 반대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 ③ 다국적 기업 등 미국의 금융독점자본세력들의 전 세계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3) 전 세계에 민주주의라는 미명아래 미국식 정치제도․제국주의 문화를 침투시켜 정신적인 부분까지 종속시키겠다는 의도이다.

2) 대외정책을 보장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체제

탈냉전시기 미국 금융독점자본세력들과 군수독점자본세력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개입-확산정책’을 수립하였는데 이를 실행에 옮겨 안정적으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긴장과 분쟁이 필요했다. 그러한 것을 실현하는 것은 소련이 붕괴한 탈냉전시기에 재래식 병력과 무기만으로도 가능하였지만 미 제국주의 세력들은 그것만으로 충족하지 못하였다. 전 세계의 유일패권을 확보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약탈과 착취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미사일 방어체제(MD ; Missile Defense)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 미국에 위협을 가할만한 세력과 국가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탈냉전시기의 미국의 정책적 목표가 되었다.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그리고 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들이 전파되는 것을 막고, 전파되었을 시 무력화시킨다는 것이 탈냉전시대 미국 세계전략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정책 중 하나가 대량살상무기 비확산(Non-proliferation)체제를 구축하려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가 전역미사일방어망(TMD ; Theatre Missile Defense)과 국가미사일방어망(NMD ; National Missile Defense)와 같은 미사일 방어체제의 건설이다. 이 두 가지를 통해 미국은 자신의 핵전력은 보호하되 세계 다른 나라들의 대량파괴무기들이 제거되거나 무력화되는 상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는 기존의 핵억제정책과 핵우산 정책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핵억지가 미국 본토에 적용되는 핵전략이라면 국가미사일방어체제는 미국 본토에 적용되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다. 또 핵우산이 미국의 동맹국에게 미국이 적용하는 핵전략이라면, 전역미사일방어체제는 미국의 동맹국에게 적용하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것이다. 핵우산이 냉전시대부터 탈냉전 초입까지 미 군사력 전진배치와 함께 미국 주도의 동맹 체제를 떠받치는 패권전략의 일환이었다면, 탈냉전 이후에는 그 패권전략을 미사일 방어체제라는 새로운 차원의 우산을 추가함으로써 더욱 강화시켜 ‘팍스 아메리카’를 완성시키겠다는 미 제국주의 세력들의 의도인 것이다.


5. 연재를 마치며

이번 글로써 [전쟁국가 미국의 정치경제적 기초]와 [냉전․탈냉전시기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연재 글이 정리되었다. 미 제국주의의 운영원리는 무엇이고 그의 실현을 위한 정치군사적, 경제적 대외정책은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를 밝혀낸 것이다.
연재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동북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 조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동과 함께 미 제국주의 이익실현의 핵심적 지역이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이남은 미국의 지역군사동맹에 포함되어 자주성을 상실하고 미국 군사정책에 좌지우지 되어 왔다. 또한 이북은 냉전시기에는 소련 동맹국으로 잠재적 위협국가로 분류되었고, 탈냉전시기에는 새로운 시기 새로운 적국의 필요성으로 인해 ‘불량국가’로 분류되었다. 1990년대의 이남의 대미 종속적 현실과 이북과 미국의 치열한 대결의 역사를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인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과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미 제국주의의 이익실현의 핵심지역이고 세계패권 확보를 위한 요충지인 동북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 조국은 항상 전쟁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하기에 조국의 평화와 통일은 남북 간의 관계만으로는 해결되기에 어렵고 미국과의 대결에서 종국적으로 승리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히 미 제국주의는 한반도가 자신의 사활적 이익을 담보해주는 지역이 때문에 더욱더 쉽게 발을 빼지 않을 것이다. 민족공조로 전민족이 단합하고 단결하여 두 개의 힘이 하나로 응축되었을 때만이 미 제국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2005년 오늘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선군정치를 중심으로 한 이북의 역량과 이남의 반미자주역량을 하나로 일치시켜야 한다. 결성된 ‘615 공동위’를 중심으로 둘을 하나로 일치시켜나가 민족공조를 공공히 하고 더불어 ‘주한미군 철수 공대위’를 하루빨리 거족적으로 건설해 남북해외 3자의 힘으로 미군철수를 실질화 시켜야 되는 시기인 것이다.<끝>


<별첨> 참고문헌

1. 이삼성, {세계와 미국}, 한길사, 2001
2. 문영일,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사상사}, 을지서적, 1999
3. 권용립, {미국 대외정책사}, 민음사, 1997
4. 김수행,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두산동아, 1996
5. 차명수, {금융공황과 외환 위기}, 아카넷, 2000
6, 강일선, {강자의 논리}, 열린포럼21, 2000
7. 이수형, {미국외교정책사}, 한울아카데미, 2000
8. 이삼성, {현대미국외교와 국제정치}, 한길사, 1993  

미군강점 60년 기획특집


우리 민족 대 미국의 대결 100년사③
미국의 남조선 식민지예속화책동과 조선민족의 반미민족해방투쟁 : 1945년부터 1950년까지 (2부)

박제민 /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순서>
1. 미국의 조선분할정책과 식민지예속화정책
2. 조선 영구분할책동
(1) 1단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무력화
(2) 2단계: ‘조선문제’의 불법적 유엔상정과 이른바 유엔조선위원단의 조작
(3) 3단계: 남조선만의 망국적인 5.10 단독선거 강행
3. 식민지 예속화책동
(1) 군사적 예속화책동
(2) 정치적 예속화책동
(3) 경제적 예속화책동
(4) 문화적 예속화책동
별첨: 미 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 제 1호, 제 2호 전문

본 기획연재 중 해방 후 5년을 다룬 ‘미국의 남조선 식민지예속화책동과 조선민족의 반미민족해방투쟁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특수하고 특기할 사변이 많은 관계로 3부로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역사적 상황상 각각의 연재가 연관성이 크고 필자의 준비가 부족하여 중첩되는 내용이 다소 존재합니다. 이 점을 양해 바랍니다.(필자 주)

1. 미국의 조선분할정책과 식민지예속화정책

지난 연재 1회분에서 밝힌바 있듯이 미국은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점령정책’을 추진해 왔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 대한 세 차례의 무력침공이 실패로 돌아가고 아시아 및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역량관계상 직접조선을 점령하기가 어려운 조건 하에서 조선점령방식을 일본을 타고 앉는 방식으로 전환했었다. 그러나 미일제국주의간의 모순이 격화되어 미일동맹이 파기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를 기회로 일본을 밀어내고 조선을 직접점령하기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사회주의가 급속히 퍼져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여파로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또한 과거 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반식민나라들에서도 반제민족해방운동이 급격히 고양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회주의권의 급성장과 반제민족해방운동의 확산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진출을 가로막는 큰 위협요소로 되었다. 이러한 세계적 움직임은 아시아에서도 나타났다. 유럽과 남미에 비해 아시아에서는 별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했던 미국으로서는 아시아에서 확산되어가는 사회주의운동과 반제민족해방운동을 저지시키는 것이 아시아 침략의 위해 사활이 걸린 문제로 대두되었다. 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적 요구는 아시아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에 대한 분할과 강점, 식민지 예속화정책추진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는 1946년 4월에 배상문제 특별보좌관직에 있었던 바우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중 “조선은 큰 나라는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성공을 좌우하는 사상전쟁의 무대로 된다”고 밝힌 부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미국에게 조선은 중국, 소련 등 사회주의 진영의 진출을 막는 제 1방어선임과 동시에 제국주의 팽창의 교두보였으며 아시아의 반제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미국은 이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영구분할과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예속화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2. 조선 영구분할책동

조선을 영구분할하기 위해서 미국은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미국의 기도는 3단계를 거쳐 추진되었는데 1단계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고 2단계는 조선문제를 불법적으로 유엔에 상정하는 것이었으며 3단계는 실제로 남조선에서 단독정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 1단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무력화

조선의 독립과 건국문제(이하 조선문제)는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문제에 속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문제 및 조선문제는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 소, 영 삼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내 각 계층의 모든 민주세력이 참여하는 임시 조선 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최고 5년간의 4개국(미, 소, 중, 영)에 의한 후견제 실시여부를 결정할 것.
셋째. 후견 기간에는 전적으로 조선인이 임시정부를 통해 스스로 통치할 수 있게 할 것.
넷째,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조속히 논의할 것.

미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논의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으나, 전범국가도 아닌 조선이 30년씩 신탁통치를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음으로 미국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부분 소련의 주장이 반영되어 결정되었다. 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대로라면, 미국의 조선점령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미 제국주의의 세계패권 전략과 아시아침략정책에 큰 걸림돌로 되었다. 결국 미국은 앞에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이를 파탄내기 위해 책동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악의적으로 왜곡, 은폐시켜서 조선에서 반탁치, 반공산주의, 반소련, 반북조선 여론을 확신시켜 조선민족의 자주적인 임시정부수립을 결정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을 완전히 왜곡시켰다. 이어 미국은 의도적으로 억지주장을 피며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을 무력화시켰고 조선문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권한도 없는 유엔(국제연합:United Nations)에 불법적으로 상정시켜 결국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은 완전히 백지화시켰다.(지난 연재 2회분의 ‘3. 미국의 조선 영구분할책동’ 부분 참고)

2) 2단계: 조선문제의 불법적 유엔상정과 이른바 유엔조선위원단의 조작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을 파탄 낸 미국은 자신의 영향력하의 유엔에 조선문제를 불법적으로 상정하고 남조선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수순을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1947년 9월 23일, 유엔 총회 제2차 대회에서 자국의 영향하의 나라들을 동원하여 조선문제를 유엔의 의제로 삼는 결의를 통과시킨 미국은 같은 해 10월 28일~11월 5일 유엔총회 제 1위원회(또는 정치위원회)에서 조선문제를 논의에 붙이기 시작하였다. 이어 11월 14일에는 조선에서 실시될 선거를 관리하는 권한을 갖는 이른바 ‘유엔조선위원단’을 역시 자신의 영향 하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국민당 하의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등의 나라들로 구성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어 미국은 이듬해인 1948년 2월 26일에 마침내 아무런 권한이 없는 유엔 소총회를 소집하여 남조선만의 단독선거를 의결시켰다. 이러한 미국의 기도에 반대하여 1948년 2월에 조선에서는 광범위한 민중이 궐기하여 투쟁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2.7구국투쟁이다.

3) 3단계: 남조선만의 망국적인 5.10 단독선거 강행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과 새 조국건설의 염원을 짓밟는 남조선만의 단독선거방침에 대해 전 조선민족은 반대하여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조선민족의 투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남조선에 대대적인 무력을 동원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선거를 앞두고 ‘특별경비사령부’란 것을 만들어 무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1948년 5월 30일 유피(United Press)통신은 “남조선 점령미군이 지난 2주 사이에 약 50%가 증가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남조선 전역에 탱크,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미군 기동부대와 군용비행기가 배치되었고 부산과 인천에는 군함이 파견되었다. 선거 직전에 경찰병력은 3만 5천명에서 5만 명으로 증강되었고, 경찰을 보조하는 조직으로 향보단(鄕保團)이라는 어용조직도 만들어 졌다. 투표소에는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었고 골목마다에는 무장경관과 테러단이 배치되었다. 5월 7일부터 선거일인 5월 10일까지 나흘간 체포된 사람들만 해도 5만 425명에 달했다. 불법과, 협박, 강요 속에서 진행된 선거결과 남조선에서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친미대리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망국적인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전 조선민족의 피어린 투쟁이 동반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제주 4.3 항쟁과 5월 단정단선 반대투쟁이 남조선을 뒤덮었으며 남북의 지도자들이 평양에 모여 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조국의 영구분단을 막고 미국을 몰아내기 위한 전민족적 결의를 모아내기도 했다.


3. 식민지 예속화책동

미국은 남조선단독정부의 조작을 통해서 조선의 영구분할을 꾀하는 한편, 남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점하기 위한 식민지 예속화책동을 벌였다.

1) 군사적 예속화책동

미국의 남조선 지배는 전적으로 군사적 강점에 의해서 유지, 강화되었다.
미국은 남조선 민중들의 반미민족해방투쟁을 무력으로 억압하고 중국과 소련, 북조선 등 사회주의 진영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선을 민중 탄압의 ‘군사감옥’으로, 아시아 침략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것을 목표하여 군사적 예속화책동을 감행하였다.

(1) 군용도로 건설

미국은 군용도로로 쓸 목적으로 경인도로를 확장, 개수하고 서울-부산간 도로개수공사를 벌였으며 김포비행장을 경유하는 서울-인천간의 새로운 군용도로와 38선을 따라서 새로운 군용도로를 내오는 공사를 추진하였다.

(2) 군사기지 건설

미국은 제주도의 군사시설을 증강하였고 동시에 모슬포 비행장을 비롯한 각 비행장을 확장하였으며 김포 비행장을 대규모적으로 건설하였다. 원주, 함양, 남원, 수원, 광주, 대구 등에는 공군기지를 건설하였으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포항, 인천, 부산, 진해, 여수  등의 항만을 개축하여 해군기지를 건설하였고, 목포 군산 묵호 등에 해군기지를 신설하는 등 남조선 전역에 군사기지를 배치하였다.

(3) 미국 주도하의 남조선 무력창설

미국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제 28호에 의거하여 ‘미군장교가 지휘’하는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일제강점시기에 일본군대에서 복무하면서 애국자와 민중을 학살했던 조선인 군관들과 악질적 경찰들을 새로 창설된 남조선무력에 망라시켰다. 일본천황을 위해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던 다카키 마사오(한국명: 박정희)와 같은 친일민족반역자가 해방 이후에도 군사분야에서 복무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주도하의 남조선 무력창설이라는 비극적 현실이 빚어낸 희극이었다. 1945년 11월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창설되었으며 1946년 5월에는 군사영어학교를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이 태생부터 미국 지휘아래 조직되고 운영된 남조선 무력은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지키는 ‘민족군대’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고 미군의 하위무력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2) 정치적 예속화책동

미국은 남조선단독정부 수립과 친미수구세력의 육성을 목표로 정치예속화책동을 감행했다.
미국이 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에 대해 식민통치를 감행했던 일제와 다르게 조선인을 내세워 남조선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이유는 남조선 민중의 권익보장과는 거리가 먼 신식민주의에 입각한 기만술이었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민족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를 외치며 새 조국 건설을 위한 변혁의 길로 전면적으로 떨쳐나서고 있었다. 해방 이후 조선민족의 최대염원은 자주독립국가였다. 만약 이러한 시기에 일제와 같이 총독정치를 실시한다면 이는 화약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인을 앞세워 남조선정부를 건설하여 마치 이 정부가 남조선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조작하여 자신의 대조선 식민지예속화책동을 감추고 민중의 반미민족해방투쟁을 희석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은 과거 친일파와 민족반역세력, 친미우익집단을 모아서 육성하고 정치세력화하여 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의 토대로 삼았다.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지배는 군사적 예속화책동과 함께 조선민족의 반미민족해방투쟁의 간고성, 복잡성, 장기성을 초래하게 한 주요요인이었다.

(1) 반미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탄압

대격변기의 조선은 자주독립과 새 조국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반미민족해방운동의 활무대였다. 미국은 이러한 반미민족해방운동을 남조선에서 고립, 축소시키는 것을 정치적 예속화책동의 첫 자리에 두고 전면적인 탄압을 가했다.

① 인민위원회 강제해산
우선 미국은 각계각층의 민주세력을 대표하여 결성되었던 전국의 인민위원회들를 강제로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미군정 장관 하지는 “군정청은 조선의 유일한 정부이다. 군정청은 군정청 본부와 도, 시, 군에 있는 기존의 각 기관을 운영한다. 남조선 주민은 군정청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고의로 군정청을 비방하는 자는 처벌한다”하고 성명을 발표하여 남조선 민중들을 협박하면서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민중들의 수중에서 빼앗은 모든 권력을 군정청으로 집중시켰다.

② 악법조작을 통한 민중탄압
미국은 각종 악법을 만들어내서 반미민족해방운동과 남조선민중을 탄압하는데 적극 이용하였다. 1945년 10월 30일, ‘군정법령’ 제 19호를 통하여 노동쟁의해결의 ‘강제조정방법’이란 것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투쟁을 탄압하였고 1946년 2월 20일에는 ‘군정법령’ 제 55호(정당등록법)을 공포하여 일체의 결사를 금지시켰으며 같은 해 5월 4일에는 ‘군정법령’ 72호에서 ‘군정위반에 관한 범죄행위라는 것’을 발표하여 미군정의 반대하는 일체의 행위를 모두 범죄화시켰다. 이어 1946년 2월, 군정지시 와 일반집회에 관한 건, 1947년에는  군정청 경무부장 통첩. 정당대중단체 등의 데모행진 및 집회의 허가에 관한 건, 1943년 5월에는 ‘군정법령’ 88호 ‘신문 및 기타 정기간행물의 허가에 관한 건’ 등의 악법을 조작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등 남조선민중의 초보적인 민주적 권리와 자유조차도 박탈하였다. 이와 같이 미군정이 조작한 악법들은 일제시기의 악법을 이어받은 것들 가지 포함하면 500여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③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
미국은 인민위원회를 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과 같은 진보정당, 민주적인 정당, 노동조합, 농민동맹,  청년동맹 등 대중단체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1946년 1월 학병동맹회관을 습격하여 진보적인 학생들을 탄압하였고 같은 해 5월에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에 대한 전면적인 검거와 투옥에 들어갔다. 같은 해 7월, 미국은 조선화물자동차회사의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하였고 8월에는 전라남도 하의도에서 강제공출을  반대하는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상하였다. 미 군정청이 들어서고 1년간 진행된 민중운동탄압에 분노하여 남조선 인민이 크게 궐기하였다.

④ 신문폐간
미국은 1946년 9월 <조선인민보>와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민주적인 신문들을 강제로 폐간시켰으며 같은 해 9월부터 다음해 8월가지 11개월 사이에 <노동인민>, <국제일보>, <문화일보>, <광명일보> 등 11개의 신문을 폐간시켰다.

⑤ 반미민족해방운동의 내부교란
미국은 반미민족해방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비밀공작도 병행하였다.
미국은 운동대오내의 분파주의자들을 회유, 협박하여 자신의 아래에 두고 운동의 분열을 꾀했고 이들이 제공한 운동대오내의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운동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하기도 하였다. 박헌영, 최창익 등과 같은 이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은 민중운동단체간의 불화를 조성하기 위해서 1946년 3월 대한노총, 1947년 대한농총 등의 어용단체들을 조직하여 반미민족해방운동을 지향하던 기존의 단체들과의 분란을 조성하였다.


(2) 친미수구세력의 육성

① 테러단활동 지원
미국은 과거 친일주구들과 민족반역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만든 무력테러 단체인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 다양한 테러단체들을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들 테러단들은 미 군정청이 직접 나서서 탄압할 수 없는 부분 예를 들어, 민중운동 지도자에 대한 암살과 테러 등과 같은 일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들은 친미수구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반대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정치깡패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테러단 중에서 특히 서북청년단은 제주 4.3항쟁당시에 제주민중을 처참하게 학살한 것으로 그 악명이 높았다.

② 친일파, 민족반역세력 보호
1945년 9월, 남조선에 도착한 미군 장성 하지는 기자회견을 통해 “수 십년에 걸친 악정을 단시일 내에 모두 시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밝히며 ‘일제시기의 식민지 지배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겠다’고 공언하였다. 하지의 이와 같은 망발은 ‘미 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 제1호 2조’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제 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포고 제1호 2조 中

결국 미국의 이와 같은 기만적 조치로 일제치하의 민족반역세력들은 면죄부를 받고 다시금 정치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이들의 명맥이 남아서 유지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친미수구세력들이다.

③ 친미수구세력의 정치세력화
미국은 대리정권을 구성할 친미수구세력들을 육성하여 이들을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탄생된 반동적 친미정치세력들 중 송진우, 김성수, 김동원 등 ‘한국민주당’의 거두들은 미군정장관의 최고고문으로 위촉받아 활동하였다. 또한 미국은 1946년 2월, 친미파인 이승만을 의장으로 내세워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이라는 것을 조작하였다. 또한 미국은 같은 해 12월에 이른바 ‘입법의원’을 조작하여 역시 반동적인 친미정치세력들을 규합하였다. 1947년 6월, 군정청 행정부를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하는 등 친미파들의 활동무대를 만들기 위해 부심하였다.
이후 건설된 남조선단독정부 즉 친미대리정권의 핵심요직에 이들이 대거 포진했음은 물론이다.  

3) 경제적 예속화책동
미국의 경제적 예속화책동은 남조선의 자생적인 모든 경제적 지반을 무너뜨려서 반신불수의 미국 하위경제로 만드는 것을 그 목표로 감행되었다.

(1) 이른바 ‘적산’의 수탈

1945년 9월 25일, 미국은 ‘군정법령’ 제 2호 ‘적산에 관한 입법’과 같은 해 12월 6일 ‘군정법령’ 33호 ‘조선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의 취득에 관한 건’을 발표하고 일본인 소유의 공적, 사적 재산은 미 군정청이 그 소유권을 계승한다고 포고하여 남조선 경제의 주요부문을 대다수 장악하였다. 당시 미국이 수탈해간 이른바 ‘적산’은 남조선 산업의 85%에 해당했다. 당시 출판물에 의하면 공장 및 광산-2690건, 동산-3924건, 선박 -225건, 창고-2818건, 점포-9096건 ,농지-32만 4404정보, 택지-15만 827건, 주택-4만 8456건, 기타의 토지-1366건, 임야-7만 39건, 과수원 -2386건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적산’ 수탈을 통해 미국은 남조선 산업의 대부분의 명줄을 쥐게 되었다.

(2) 원조와 차관을 통한 남조선 경제장악

미국은 자국의 잉여상품과 노후한 병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남은 군수물자들을 남조선에 원조하였다. 미국이 1948년 말까지 남조선에 투하한 원조총액은 4억969만 달러였는데 구성을 보면 수년간 방치되어 변질된 식량이 1억756만 달러(총액의 42%), 남조선의 토양에 맞지 않는 비료가 7천799만 달러(총액의19%)에 달했다. 그밖에 피복 및 직물류가 4779만 달러(11.8%), 석탄류 3334만 달러, 석유류가 2035만 달러였다. 원조라는 미명아래 이루어진 미국의 잉여소비재의 강요는 남조선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 해당부문산업을  완전히 몰락시켰으며 경제의 자립적 발전의 길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또한 미국은 1946년 8월에 일방적으로 ‘해외잉여물자 청산위원회’의 차관 487만 7천 달러를 남조선에 공여한다고 결정하고 미군이 2차대전 당시에 동남아시아에서 사용한 낡고 쓸모없는 물자를 차관에 넣고 강제로 남조선에 주었고 이후에는 차관의 원리상환의 의무를 부과하여 조선의 경제를 옭아맸다.

(3) 주요기업체의 해체

미국은 남조선의 기업체를 조직적으로 해체, 파괴하였다. 이 결과 남조선의 공장 및 기업소 수는 1947년 3월말 현재 1943년 6월에 비해 44%로 감소하였고, 취업노동자 수도 같은 기간의 59%로 감소하였다. 기간산업에 해당하는 공업부문의 생산고는 매년 10%가까이 줄어 들었다. 강철생산도 1944년에 비해 1946년에 33%로 줄었고 이듬해인 1947년에는 22%로 곤두박질 쳤다. 해당 부문의 경제가 미국에 완전 종속되었음은 물론이다.

(4) 예속자본의 육성

미국은 경제영역의 ‘친미수구세력’도  길러내기 시작했다. 예속자본가들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적산’이라는 미명 하에 수탈해간 남조선의 산업들을 친미자본가들에게 헐값으로 제공하여 예속자본가들의 경제적 지반을 닦게 해주었다. 1947년 1년 동안에 1945년 8월 15일 가격을 기준으로 146억 원에 해당했던 주택, 선박 기업소등을 고작 2억4천 463만 원에 넘겨주었다. 이렇게 헐값으로 ‘적산’을 불하받은 자본가들은 이후 매판자본가, 예속자본가가 되어 남조선 경제의 미국 하부경제화를 이끌어 나가는 ‘경제판’ 친미수구세력이 되었다.



(5) 봉건적 토지관계의 유지

당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반봉건투쟁을 벌이며 대지주에게 토지가 집중되어 있는 봉건적 구조를 ‘토지개혁’을 통해 해체시켜가고 있었던데 반해, 미국은 남조선의 봉건적 토지관계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남조선의 봉건적 토지관계는 여러모로 미국의 경제적 예속화정책에 일조하였던 것이다. 대지주들이 미국으로부터 봉건적 토지관계를 인정받는 대가로 친미파가 되어 민중을 수탈하는 ‘마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다수의 농민들이 소작농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게 묶어 둠으로써 조선경제의 발전과 농민운동의 발전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1946년 2월에 자신이 직접 ‘신한공사’을 조직하여  재산가치 1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토지를 모아서 남조선의 대지주가 되어 조선의 농업생산물을 약탈해 가기도 하였다.

(6) 인위적으로 노예적인 노동조건 형성

미국의 남조선경제에 대한 수탈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노예노동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최대한의 착취를 하는데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미군정은 남조선 노동자들에게 ‘군정법령’ 14호, 19호. 21호 군정과도정부명령 4호 등을 공포하여 혹독한 노동강화와 노동시간의 무제한 연장을 감행하였다.

4) 문화적 예속화책동

미국의 문화적 예속화책동은 남조선민중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희석시키는 숭미주의, 공미주의 등의 노예굴종사상을 퍼뜨리는데 집중되었다. 또한 과거와는 달리 ‘반공사상’을 조장하여 남북 민족가의 대결을 적극 조장하였다.

(1) 문화유산말살

미국이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에 통보한 포고령 1호는 모든 공용어를 영어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남조선에서 조선어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한 문화말살책동의 일환이었다. 또한 미국은 경복궁에 미군의 병사(兵舍)를 세웠으며, 조선의 문화유산을 빼돌려 가는 등 조선민족의 자주적인 기개를 상징할 만한 문화적 전통과 유산을 말살하는데 열을 올렸다. 또한 미국은 남조선민중의 생활에 서양식 문화를 도입시키고자 획책하기도 하였다.

(2) 반공사상의 유포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은 새로운 문화적 공세로 ‘반공사상’을 유포시켰다. 이 반공사상을 유포시켜 남조선과 북조선을 대치시키고, 다시 남조선에서 좌익과 우익을 대결시켰으며, 종국적으로는 반미민족해방운동진영을 공산주의로 몰아서 탄압하여 남조선에서의 반미민족해방운동을 불법화하는데 적극 이용하였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문화적 예속화책동은 반공=애국, 연공=매국이라는 기이한 등식을 성립시켰다.<계속>

별첨: 미 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 제 1호, 제 2호 전문

미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 제1호(조선인민에게 고함)

본인은 미 태평양 총사령관으로서 조선인민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일본의 천황과 일본 정부의 이름으로, 또한 일본제국 총사령부의 명령 및 이름으로 서명된 항복문서가 규정하는 바에 의해 본인이 지휘하는 승전군은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의 오랜 기간을 통한 노예 상태와 조선이 즉시 해방되어 독립할 것이라는 이들의 결의를 염두에 두면서, 점령의 목적은 항복 문서를 실시하고 조선인의 개인적, 종교적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본인은 보증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력과 복종이 요구된다.
본관은 태평양방면 미 육군총사령관으로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으로써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및 인민에 대한 군정을 펴면서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최고 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제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동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제4조 주민의 재산권은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직무에 종사한다.
제5조 군정 기간에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의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제6조 앞으로 모든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될 것이며, 주민이 이행해야 할 사항들을 명기하게 될 것이다.
일본 요꼬하마에서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 육군총사령관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

미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 제2호(범죄 한국에게)

본인이 지휘하고 있는 군대의 안전과 점령지역에서 공공의 치안을 위해 미 태평양방면 총사령관으로서 본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어떤 사람도 항복문서의 조항과 또는 미 태평양방면 총사령관의 권한 아래 내려진 포고, 명령, 지시에 위반하거나, 미국과 그 연합국의 국민 또는 재산의 질서, 생명, 안전, 치안을 해치는 행위, 공공의 안녕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 정의로운 행동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 또는 연합국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포함한 기타의 판결에 처해질 것이다.
1945년 9월 7일 요꼬하마에서
미 태평양방면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미군강점 60년 기획특집


선군정치란 무엇인가 ①


김서원 /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연재를 시작하며

한반도 정세가 또다시 일렁이고 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후 2002년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 제2차 ‘한반도 핵위기’가 2월 10일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과 6자회담 무기한 불참선언’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북의 인내성있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 테이블에서 ‘선핵포기’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며 대북 군사적 침공 준비에 열을 올리던 미국이 2월 10일 북한 외무성 성명으로 당황하고 있다. 이에 북한은 3월 31일 또다시 한반도 비핵화와 군축을 위한 회담을 제안함으로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미국에게 연속타격을 가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연속타격은 미국의 대북공격 의사를 완전히 꺾었으며, 대북적대정책을 포기시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이다. 북의 연속 타격에 의해 미국은 뒤로 밀려가고 있으나 북한을 향한 침략의 예봉, 그 방향마저 뒤로 돌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예봉을 더 날카롭게 벼리며 북의 허점을 찾아 공격할 틈을 찾는 한편,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 시키려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예속화 정책을 강화해나갈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 미국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국주의 미국의 본성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동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는 한반도에서 또 다시 미국에 의한 전쟁을 막기 위한 반전평화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성화하고 그 기세를 반미자주화운동으로 상승시킬 요구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전평화운동과 반미자주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남과 북이 하나 되어 강력한 민족자주역량을 구축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하나된 강력한 민족주체역량, 민족자주역량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핵적인 과제로 되는 것은 두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째, 반전평화운동과 반미자주화운동 자체가 남측만의 혹은 북측 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과 북 전민족의 생존권과 자주권을 지키는 운동으로서, 전민족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둘째, 당면한 반전평화운동과 그 상승발전으로서 반미자주화운동을 통한 전민족적인 자주역량의 구축만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반도 전쟁계획과 대북적대정책을 포기시킬 수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기본 속성이 침략과 약탈이며, 식민지에서 제 발로 걸어나가지 않는 법이지만  강력하게 단결한 민족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것이 또한 역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민족이 마련해준 ‘명예로운 퇴각’의 길을 미국이 끝내 거부하고 전쟁을 일으키려고 할 때 그것을 미연에 막을 힘도, 벌어진 전쟁에서 우리 민족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단시간 내에 전쟁을 우리 민족의 승리로 귀결 시킬 힘도 전민족적으로 단결한 민족자주역량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단결된 민족자주역량은 어떻게 구축되는가?
우선 조직적으로는 이미 결성된 6.15공동위원회와 앞으로 결성된 미군철수남북공동대책위원회를 강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6.15 공동위원회는 광범위한 각계각층의 국민들을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기치, 자주평화통일의 기치 아래 묶어 세워 민족자주역량의 가장 넓은 대중적 토대를 닦아나가는 역할을 한다면 미군철수공대위는 민족자주화운동의 가장 중핵적인 과제인 주한미군철수운동을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벌여내는 선봉대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의식상의 과제로서는, 북을 단순히 통일의 한 주체, 우리 민족의 일부로 인식하는 차원으로부터 전민족적 자주화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위력한 민족역량의 일부로 인식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6.15남북공동선언이 가져다준 한국 사회의 변화 가운데서 가장 필적할만한 것이 바로 북에 대한 인식변화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동정의 대상’임과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라는 인식으로부터 통일과정에서 화해와 단합을 이루어야 할 형제동포, 민족대단결을 이루어야 할 우리 민족의 한 구성부분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거대하게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단계 더 질적 도약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
조국통일문제를 해결하는데서도 그렇고 당면해서 드리워진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반전평화 및 한반도 비핵화 그리고 반미자주화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현재 북한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당면해서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반미자주화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나아가 전민족적인 자주권을 회복하는데서 북의 민족역량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전민족적인 민족주체역량을 구축하는 데서 새롭게 요구되는 인식상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상의 전환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당면한 구체적인 과제는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북한의 핵무기와 관련된 문제이고 둘째는 핵무기를 개발하여 미국과 맞서고 있는 북한의 정치체제, 즉 선군정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문제이다.

본 연재는 이 두 가지 문제 가운데 두 번째 문제인 북한의 정치체제인 선군정치에 대한 인식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남측의 이른바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선군정치’를 두고 군부독재체제니, ‘거대한 병영체제’니 하는 말들을 해왔고 이름 있는 어떤 일본의 학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유격대국가’로부터 ‘정규군 국가’라고 부르기도 해왔다.

그러나 필자는 본 연재를 통해 ‘선군정치’가 인류 역사에서 탄생하였던 여러 가지 정치 유형 가운데 하나이며 나아가 진보적인 정치유형이라는 점, 또한 그것이 ‘체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정치방식’이 아닌 앞으로 펼쳐질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은 정치유형이라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한편, 현재 우리 민족의 지상의 과제인 자주와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북의 선군정치가 어떤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 할 것인지를 규명하는 것 역시 본 연재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이다.

1. 간략히 돌아본 인류 정치사

1) 고대 정치에서 현대민주주의까지

정치는 역사적으로 원시공동체 사회의 말기, 고대 여명기에 공동체의 촌장이나 군지휘관의 통일적 지휘 속에 미숙하나마 그 모습을 차츰 드러냈다. 하지만 씨족사회의 구성원들은 혈연적 유대로 연결되고 생활은 단지 살아남기 위한 활동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조직도, 직업적인 정치가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1)고대 정치

고대 노예제 사회의 정치는 그 형태를 갖춘 역사상 최초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정치’의 고향이라고 하는 그리스의 정치체제를 간략히 살펴보자.(민주주의가 유럽의 역사에서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때 크게 고대 민주주의와 근대 민주주의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민주주의는 그리스 도시공동체 아테네에서 행해졌던 정치 방식을 그 전형으로 가지고 있으며 오늘 날 민주주의의 뿌리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이 시기 민주주의는 전체 시민이 직접 입법부를 구성하고, 정책을 토론하며 투표에 참가하는 직접민주주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아테네 인구가 약 30만이었는데 그 중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그 가운데 약 10%정도였던 3~4만 명에 불과한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고대의 민주주의는 ‘소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직접민주주의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이란 노예소유주를 의미했으므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노예주의 지배를 위한 민주주의 정치, 노예 소유자의 정치였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정치 역시 공화정, 제정(帝政), 과두정치체제 등으로 변천했으나 본질적으로는 노예소유주들의 정치였다. 노예소유자 계급은 국가권력과 생산 수단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대중 지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한 인류 최초의 정치는 사회 전체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특정 계급을 위한 정치였던 것이다.

노예소유계급의 정치는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에서 극도의 괴리를 낳았다. 사회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대다수 노예를 포함한 대중들이 피지배계급의 지위에 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노예 소유주들이 지배계급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의 괴리, 이것은 어떤 시대와 사회제도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 사회적 불공평과 부정은 이것에 의해 생기는 것이지 단지 사적 소유의 결과로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에서의 괴리는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격화시켰다. 즉, 노예와 노예주 간의 계급적 모순도 격화시켰고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 역시 격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이 정치적 위기의 심화로 나타나자 통치자들은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한편, 회유정책도 실시했다. 피지배계급의 일부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는 등의 해방노예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노예계급의 투쟁에 의해 노예제 사회는 활력을 잃고 봉건사회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중세 정치

인류 정치에서 중세 사회로의 이행은 중요한 전환이긴 했어도 근본적인 전환은 아니였다. 민중들의 지위가 노예에서 농노로 전환되었을 뿐 여전히 피지배계급으로 머물러 있었고 노예주적 귀족은 봉건적 귀족으로 되어 민중 위에 군림하는 지배계급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사회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봉건 정치이며 봉건 귀족의 이익에 맞게 사회를 관리하는 정치였다. 왕을 필두로한 봉건귀족과 영주는 봉건 사회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급이였고 농노에 대한 봉건적 착취와 억압을 위한 사회적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봉건 정치의 주된 목적이었다.
봉건정치는 첫째, 국가권력이 왕(또는 황제, 영주 등)에 속하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지배가 왕권의 실현으로 표현되는 군주정치였다.
봉건적 군주정치의 특징은 왕의 인격이 신격화되어 그 지위는 종신적이고 세습적이며 그 권한은 절대적이고 무제한했다.
봉건정치는 둘째 철저한 신분정치였다. 봉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신분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 신분은 일생동안 고착되고 세습되는 것이었다. 봉건 사회는 신분제에 의해 유지되었고 또 신분제에 의해 멸망했다고 볼 수 있다. 신분제가 민중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극도로 억압하였고 그로 인해 각종 정치투쟁들이 일어났으며 결국 신분제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하의 ‘부르조아 혁명’으로 봉건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봉건정치는 셋째 암흑통치였다.
봉건 통치계급은 민중들을 무지몽매한 채 지배하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여 정신적으로 예속시켰다. 그러나 민중들의 자주적 요구의 상승과 창조적 능력의 확대는 그것을 막을 수만은 없었고 결국 민중들의 투쟁에 의해 봉건 암흑통치는 막을 내리고 만다.

(3) 근대 정치

봉건 군주의 ‘통치’에 모두 복종해야만 했던 것이 ‘정치’의 전부였던 봉건시대가 신흥 부르조아 세력과 합세한 농민들의 혁명-시민혁명 혹은 부르조아 혁명, 근대민주주의혁명-으로 막을 내리며 새롭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근대정치’이다.

자본주의 확립기에 일어난 시민혁명은 정치, 경제, 문화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냈고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변혁이 정치의 근대화였다.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던 시민혁명(부르조아 혁명)가운데 하나였던 프랑스 대혁명에서 선언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의 표어가 되었고, 이는 봉건사회까지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유, 또는 인신적 예속과 억압이 폐기되고 신분제 대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게 된 것이다. 이른바 근대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민주주의는 당시 재산과 교양을 가진 시민들(즉, 당시의 신흥부르조아)의 권리를 봉건군주와 귀족들로부터 어떻게 찾고, 확대할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즉, 근대 민주주의는 절대군주제에 대한 반발로서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그 첫 번째 관심사이자 특징이었다. 근대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라는 큰 틀에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즉, 정부 권력을 최소화시켜 개인의 자유와 재산, 생명을 보장하려는 정치체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고 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강조는 당연히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는 소극적 정치를 지향했고 이런 면에서 당시의 국가를 ‘야경국가’라고 불렀다.
이러한 근대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의 주체가 ‘일정한 재산과 교양’을 갖춘 시민, 즉 부르조아에 국한되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대중들은 소외된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시민민주주의’혹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시민들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권력분립, 대의제, 다당제, 다수결의 원칙과 같은 형식적 원리에 의존한 민주주의였다.
결국 근대 민주주의는 정치이념상으로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및 유지를 목적으로하는 민주주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르조아 혁명과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당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이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될 수 있었던 진보적 의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민주주의 정치’ 역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부르조아 계급이 민중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 역사적 경험이자,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4) 현대 자본주의 정치

이 근대 민주주의 정치는 두 가지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20세기 들어와 심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행해지는 ‘현대민주주의’였다.
20세기 들어와 높아지는 대중들의 자주적 요구에 밀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근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시민민주주의’로부터 ‘대중민주주의’로 그 정치체제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현대의 ‘대중민주주의’는 근대의 ‘시민민주주의’와 비교해보면 대체로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보통선거제의 실시이다. 근대 사회에서 ‘재산과 교양을 가진 시민(부르조아)’만이, 특히 남자만이 갖고 있던 선거권이, 투쟁을 통해 여성으로 ‘재산과 교양이 없는’, ‘성별, 직업, 교육정도에 관계없이’ 성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게 된 것이다.
둘째, 근대민주주의 정치체제와는 비할 바 없이 국가(혹은 정부)의 역할이 커졌고, 대중들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치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혁명이 세계를 휩쓴 이후 자본주의 국가 내의 민중들의 높아지는 변혁적 요구를 ‘복지’라는 이름의 개량화 정책과, 국민들의 사소한 일상생활마저도 국가가 관리하려는 통제정책이었다.

시민민주주의가 인류 역사에서 진보였던 것처럼 민주주의 역시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근본적인 진보가 아니였기 때문에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관객민주주의’로 전락되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교육의 확대로 대중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합리적 판단능력이 향상되었으나 정치에서 대중은 정책결정의 주체라기 보다는 소비적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오늘날 자본주의 나라에서 정치는 소수 전문 정치가들만이 주체이기 때문에 대중민주주의에서 정치는 하나의 오락 또는 관객의 흥미 대상으로밖에 되지 못하였다.
둘째, 대중심리의 조작 가능성이다.
현대의 대중민주주의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그 주권의 주체는 대중이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대중의 권리가 더욱 잘 반영되고 확대되기보다는 권력자들이 각종 정치관련 기술을 이용하여 여론 조작 및 대중조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합리적인 토론과 결정이 존중되고 국민들의 의사가 정책결정에 반영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합의에 의한 독재’, ‘조작된 자발성’에 의한 정치인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적 최고 가치인 효율성과 생산성의 숭상 때문에 빚어지는 합의와 토론의 약화 현상이다. 정책의 입안과 집행과정에서도 다양한 의견제시와 토론에 의한 결정보다는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가치가 지배함으로해서 대화와 토론이 요구되는 의회정치는 말많고 골치아픈 기관으로, 국회의원들은 하는 일 없이 말만 많은 사람으로 전락했다. 다른 한편 행정부의 역할은 높아지고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숫자는 늘어났고 그들이 고도로 전문화됨으로서 이른바 대중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넷째, 셋째 현상의 연속선상에서 관료제적 민주주의로 변질되고 있다.
국가의 기능이 근대와는 달리 비대해지면서 행정부가 단순히 의회의 정책결정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기관으로부터 모든 분야에 적극 개입하여 정책을 결정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현대의 관료제는 ‘기술적 관리로부터 행정부의 지배’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는 대중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가 ‘관료를 위한 관료에 의한 관료의 정치’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으로 이 모든 것이 시민민주주의 혁명(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 이후 권력을 쥔 계급이 자본가 계급이라는 사실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높아지는 대중들의 요구에 마지 못해 형식적 민주주의는 확대, 발전되었으나, 진정으로 대중을 위한 정치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소외시키는 정치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계속>
미군강점 60년 기획특집


주한미군 강점 관련 5월 주요일지


한국민권연구소 제출


본 일지는 미군강점 60년을 맞은 올해를 주한미군이 없는 원년으로 만들기 위해 본 연구소가 만든 교양자료입니다.
미국과 주한미군이 한국사회를 예속화하고 강제점령해온 역사적 증거와 사건들을 정리하여 짧게 모았습니다.

본 일지는 한달을 주기로 정세동향 자료집에 실리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서는 매 주 금요일에 일주일 단위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자료에 한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해설도 첨부됩니다.

주한미군 철수원년, 자주통일 원년을 일구는데 열심히 헌신하실 모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료에 오류가 발견되거나 수정, 보완, 첨부사항 및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연구소 대표 이메일 minkwonyun@hanmail.net로 메일을 주십시오.

1868년
5월 17일 <셰난도어>호 함께 조선에 침공한 <젠킨스> 도굴단 일파가 영종도에 상륙
5월 18일 영종도에 상륙한 <젠킨스> 도굴단 일파, 조선군과의 격전 끝에 패하여 조선해역에서 철수


1871년
5월 30일 신미양요, 1230명의 군인과 80문의 대포로 중무장한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 5척이 조선 강화도에 침공

1882년
5월 22일 불평등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883년
5월      초대 미국 공사 후츠 서울 도착

1884년
5월13일 미국의 특별사무관 에드먼드 로버트가 본국의 국무장관에게 행한 귀국 보고에서 ꡒ약탈적인 대조선무역이 가능하다ꡓ고 지적

1946년
5월 4일     군정법령 72호 발표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1947년
5월 13일  뉴욕 헤럴드티리뷴, 한국에 대한 원조 계획관련 기사 中 ꡒ미국은 6억달러에 달하는 남한 원조계획을 작성하고 있으며, 이는 트루먼 독트린의 일부라고 보도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ꡓ
5월 19일  미국의 대표적 언론지 <타임>, ꡒ조선은 아시아 동부해안에 있어서 지배적인 기지로 될 수 있다ꡓ

1948년(제주 4.3힝쟁/단정단선반대투쟁)
5월 10일  제578가스공급 중대소속 위콘 R. 윌리엄스 중사는 카빈총을 시험해 보려고 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용산클리닝(세탁소) 점포 앞을 걷고 있던 피모씨(당시39세)에게 2발의 총탄을 쏘아 살해
5월 10일  이남만의 단독선거
5월 31일  제헌의회 성립

1952년
5월 24일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 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체결, 정식명칭 한미경제조정협정 [韓美經濟調整協定, Agreement on Economic Coordination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일명 마이어협정

1976년
5월 28일   미 국방장관 럼스펠드 "한국에서 핵무기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 발언

1980년(광주민중항쟁)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 군사쿠데타
5월 18일   광주 민중항쟁
5월 22일   미 국방성 대변인 토미스 로스가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형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고 밝힘
5월 30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 회관 6층에서 서강대 김의기(21세) 투신

1985년
5월 23일   전국학생연합 삼민투 산하 73명의 학생들이 서울 미문화원 점거

1986년
5월 3일   5.3인천투쟁 인천시민회관 앞에서 3만여명의 인파가 "미국과 군부독재 반대" 플래카드를 내걸고 진행
5월 7일    슐츠 미 국무장관 개스턴 시거 미국무성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와 방한
5월 8일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회동


1988년
5월 15일   서울대 조성만군 "올림픽 남북공동개최, 미군축출, 군사정부 퇴진" 외치며 투신

**참고자료
①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박세길/돌베개)
②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박세길/돌베개)
③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박세길/돌베개)
④ 침략의 역사 항전의 역사(김희일/기획출판 한)
⑤ 김정일의 통일전략(김명철/살림터)
⑥ 한국민권연구소 격주간 <정세동향>
⑦ 인터넷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
⑧ 인터넷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⑨ 인테넷 <네이버> 뉴스검색 http://news.naver.com
⑩ 인테넷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http://www.onecorea.org/
⑪ 각종 인터넷 포탈싸이트 지식검색 및 기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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