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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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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발전과 시민사회’
“아시아로 돌아와야 한다”
-로렌스 수렌드라 지상 강좌 ‘아시아의 발전과 시민사회’

기사- 레베카 김

유네스코 아태국제이해교육원 부원장으로 한국에 와있는 로렌스 수렌드라 박사의 성공회대 엔지오 대학원 특별강좌 ‘아시아의 발전과 시민사회’를 시민의 신문사에서 연재한다. 오리엔탈리즘을 중심으로 서구화로서의 근대화, 식민주의, 제국주의, 제3세계, 개발, 세계화 등의 문제를 역사적이고 지식사회학적인 맥락에서 탐색해나가게 될 이번 강의는 12월 14일부터 2005년 2월 1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6시 반부터 세 시간 연속되며, 영어 청강이 가능한 일반 시민 활동가들에게도 열려있다.

시리즈 첫번 째로 강사와 몇 마디 나누어 보았다.

아시아라는 이름: “우리는 모두 이주자다”

강의를 맡은 로렌스 수렌드라 교수(아래사진). 마드라스라 불리던 인도 남동부 첸네 출신이다. 툭하면 자기를 “아시아에 미친 사람”이라 부르는 인물. 마드라스 대에서 화학 공학을, 스웨덴 룬드 대에서 경제사를, 프랑스 소르본느 고등사회과학대학원에서 발전/환경 경제학(박사)을 전공했다.
80년대 초부터 국제교육이나 경제정책생산과 관련, UN과 아태지역 엔지오 사이에서 활동해오고 있는 그의 무대는 물론 전 세계이지만, 그 세계는 수없이 많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아시아로, 아시아로 회귀한다. 홍콩에 본부를 둔 지역 엔지오 ‘아시아지역 대안교환(ARENA)’의 공동 창설자, 뱅갈로르에 있는 ‘환경,개발혁신,기술,무역 연구센터(CREDITTe)’의 상임 이사. UN 위원회 활동으로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홍콩 등지를 전전하며 살아온 아시아 전문가. 아시아와 깊은 사랑에 빠진 사람.
아태 지역 어디에서든 제도 개혁을 외치는 군중이 있는 자리에는 그도 있었다. 그는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 활동가들에게 더 예리한 무기를 쥐여주는 전략가였다. 1989년 일본 전역에서 다섯 달 동안 진행됐던 아태지역 화합과 교류를 위한 공동 프로젝트 ‘21세기를 위한 민중 계획’ 워크숍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모여든 활동가와 학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도쿄 유엔 대를 비롯하여 홍콩, 인도, 캐나다, 스웨덴에서 제3세계, 개발, UN과 다자간 기구, 국제 무역체제 등을 강의해온 그에게 아시아는 각별한 의미를 띠는 이름이었다. 남이 우리에게 붙여준, 한번도 어디에 제대로 정착해본 적 없는 이름. 수렌드라는 서구 사회 중심부에서 그 이름이 바로 자신의 이름임을 깨달았다. “스톡홀름 룬드 대학을 다닐 때였는데, 난생 처음 파키스탄 친구를 사귀었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파키스탄은 예전엔 인도나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데, 스웨덴까지나 와서야 파키스탄인을 만났다는 것이 말입니다.”
파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때는 70년대 말. 그의 하숙집 왼쪽에 캄보디아인이, 오른 쪽에는 레바논인이 세들어 살았는데, 두 사람 다 사연이 깊었다. 캄보디아 친구는 폴 포트 정권에 희생된 친지와 동족을 두고 우느라 눈이 늘 충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이따금 던지곤 했다는 ‘너는 나라가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말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때렸다. 당시의 레바논 또한 전쟁 중이었다.
‘나라’라는 울타리,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보마저 박탈당한 아시아인들을 향한 기나긴 고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에게 투쟁은 이미 익숙한 현실이었다. 학사를 마치고 취직한 인도의 비료공장이 미국과 인도 중앙정부 공동 소유의 다국적 기업이었는데, 버마에서 흘러들어온 인도 피난민들을 사노예보다 더 험악하게 착취했다. 동료 노동자들은 저항했고, 그 역시 해고당했다.
80년대의 아시아는 더 짙은 포연 속에 있었노라고 그가 가리킨다. 1982-83년 스리랑카에서는 인종 간 유혈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태국과 한국은 군부정권의 독재 아래 몸살을 앓았다. 84년에는 인도 보팔 사태가 터졌고, 86년에는 필리핀인들의 봉기가 마르코스를 쫒아냈다. 태평양 군도 또한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싸웠다.
네트워킹: 연대하고 또 연대하라
80년대 초 홍콩에 설립된 ‘아시아 문헌정보센터’에 우연히 초청받아 가게 된 수렌드라는 아시아 지역 시민운동 단체들의 연대와 대안정책 개발을 위한 ‘ARENA’ 창립에 가담하게 된다. “이름 자체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지요, ‘지역간 교류’가 바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ARENA’는 80년대와 아시아를 부모로 해 나온 자식이었다. 학자, 작가, 연구자, 전문가들이 기둥인 이 독특한 엔지오는 아시아 사회의 문제를 진단(특히 계급, 카스트, 계층 다양성과 갈등, 개발과 민생환경 파괴 등), 개념화하고, 지역적 관점에서의 대안을 시민의 공공 참여 확대를 통해 제도적으로 확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아시아 몇몇 국가, 특히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더 나아졌다면 이는 그 시절의 민주주의 투쟁을 기반으로 해서 얻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전반적인 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졌어요. 거대한 힘들이 진보 운동을 끝없이 뒤로 밀어내고 있는 형국이지요. 미국은 중동에서 재미 본 만큼 아직 아시아에서 재미를 못봤어요. 80년에 미국은 혼란 상황을 일부러 조성해서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도록 도왔습니다.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에 뒷돈을 대왔고, 이 근본주의를 빌미로 삼아 이스라엘은 물론이려니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개입해왔습니다.”
아시아에서 영감과 연대를 발견해야 한다, 아시아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는 연이어 강조한다. 1999년 씨애틀(우루과이 라운드 다음의 무역체제 출범을 위한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보다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는 훨씬 덜 받지만 그만큼 더 중요한 아시아의 잊혀진 투쟁들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태국에서는 80년대를 통틀어 ‘남초원 댐’ 운동이 있었고, 엇비슷하게 필리핀에서는 ‘치코 댐’ 운동이 있었어요. 둘 다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전문가, 학자, 환경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 또 환경 보전을 위한 투쟁이 민중의 생존 투쟁, 국가와 제도의 민주주의화를 위한 투쟁과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분수령이 되는 투쟁들입니다. 허나 지금 누가 거기에 대해 말하고 있나요? 씨애틀을 비롯한 ‘화려한’ 반세계화 운동들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왜 오로지 씨애틀만이 그토록 널리 그토록 잘 알려져 있느냐하는 의문을 우리는 품어봐야 합니다. 서구 미디어가 자기들 입맛대로 다루기에 씨애틀은 일단 편리합니다. 그들은 사건 자체는 꽤나 크게 다룹니다만, 그러면서 반세계화에 동조하는 의견은 또 전부 교묘하게 비주류화하고 있어요. 서로 연관되어 있는 문제들도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기 때문에, 뒤틀린 맥락에서 떠오르는 대안들이 결국 힘을 잃고 소멸되고 말지요.”


최근의 추세는 민주주의, 환경, 인권 등 제반 문제를 분리시켜 전문화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운동은 예외 없이 이들 모두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연관성은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더 쉽게 가능할 뿐 아니라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아시아에게만 특권을 주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건 시장이 아시아를 보는 전형적인 시각이지요, 우린 어쨌거나 중요한 소비자이니까요. 그게 아니라, 서구적인 사고방식들의 이 압도적인 지배에 맞서기 위해서는 대륙적이고 지역적인 시각을 가져야만 한다는 얘기입니다.”
문제들의 상호연관은 문제들의 공유를 불러오고, 이 공유는 공유된 문제들의 해결책을 모색하게 만들면서 연대의 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이 연대는 다시 처음의 문제들을 더 분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아시아인들은 서로 더 자주 만나 대화해야 합니다.”

WTO라는 사기극
나는 바로 그 ‘아시아인들’이 서로 만나 얘기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수렌드라 교수를 너댓 번 만났다. 발제자로든 지정 토론자로든 그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꺼내는 똑같은 얘기가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닌 우리가 “전 지구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안에 살고 있다는 것. 지난봄 고려 대에서 있었던 ‘부시 낙선’ 워크숍을 상기시키면서 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시아에서는 경제가 ‘서구 정치가 사태를 조작하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 문제들이 정확히 뭔가? 혹 아시아나 아시아의 어느 일부를 EU처럼 초국적 자유 무역 블록으로 만드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는가?
“우선 이 ‘자유 무역’이란 것 말인데, 이건 ‘모델’이 아닙니다. 이건 모델이 아니라 경제와 경제 활동에 대한 특정한 견해로부터 부과된 의무(imposition: 사기라는 뜻도 있다)일 뿐이에요. 이걸 맨 처음 발의한 미국, 캐나다 같은 국가들조차 이젠 이걸 그대로 따라 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것 때문에 자기들도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개념 자체가 뭔가 ‘부자유’한 게 있다는 걸 함축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사기에요.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으면 안 될 어떤 부자유스러운 게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촘스키가 특히 이런 개념 조작을 자주 다루는데, 그러니까 ‘자유’로움은 강대국들의 무역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칼 폴라니가 1940년대의 자본 위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를 간명하게 정의내린 바 있어요. 그는 ‘규제완화는 재규제화 쪽으로 작용하며, 이 재규제화는 서구 특정 이해집단의 이해 속에 작용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자유 무역’이란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과정입니다. 자유 무역은 예속되어있는 것을 푸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경제 무역 활동을 예속하게 될 일련의 새 규제조치들을 ‘규제완화’라 속여 들이미는 무역체제 형식인 것입니다." 남인도 카르나타카 마이소르에 작은 유기 농장도 운영하고 있는 그는 특히 농업 분야에서 이에 관한 예를 밤새도록이라도 들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WTO 체제의 출범 이후 세계는 일국의 경제 규율에 맘껏 개입, 결과적으로 국가 또는 지역적으로 독자적인 경제 규율은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상위의 경제 법칙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그는 설명을 잇는다. 이 상위법의 맹점은 한 둘이 아닌데, 특히 농업 분야에서 이 법은 ‘규모’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령 4천 에이커에 달하는 온화한 기후의 미국 농장이 5에이커의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인도 농장과 똑같은 레벨에서 거론된다. “‘자유’ 무역과는 아무 상관도 없지요. 이건 분명 더 강력하고 더 잘 사는 이들에게 혜택을 주게 될 경제.무역 활동형태를 다른 이들에게까지 강제로 부과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재미난 예를 하나 들었다, 이 WTO가 추구하는 세상이 그 얼마나 웃기고 한심스러운지는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에만 들어가 봐도 안다면서. 거기 WTO가 뭔지를 설명하는 곳으로 들어가면 ‘WTO 무역 체제의 10가지 혜택’이란 코너가 있는데, 그중 다섯 번째가 ‘선택(할 게 많아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하느냐? “우리가 수입할 수 있기에 가질 수 있는 그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철 지난 과일과 채소, 예전엔 이국적이라 여겨졌던 식료품, 의류, 기타 제품들, 세계 방방곡곡에서 방금 잘려져 온 화훼류,..” 등등.
수렌드라의 반문이 이랬다. “이건 완전히 ‘온대지방 영장류’를 위한 지침이지요, 남부러울 것 없이 이미 필요한 건 다 가진 서구 선진개발국들 말입니다. 내가 왜 ‘철 지난 과일과 채소’ 걱정을 해야 되죠? 나는 어차피 일년 내내 내가 먹고 싶은 과일하고 채소를 갖다 먹어요. 내가 ‘이국적인 의류’ 걱정을 왜 합니까, 내 옷은 이미 충분히 ‘이국적’인데요. 결론적으로 일부 선진국 사람들이 일정한 삶의 질을 향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노동을 싸게 팔고, 우리 여자들과 아이들을 싸게 팔아가면서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내고 있는 거지요.”
그는 한국과 인도를 비롯한 몇몇 아시아 국가들의 (서방 세계가 요구하는 규약들에 대한) 반성 없는 추수를 아울러 비판해마지 않았다.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이 ‘명예 백인’이 되려고 안달하는 게 문제이지요. 이 용어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야했거든요. 백인들은 이 잘사는 아시아인들을 ‘명예 백인’으로 추대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그토록 들고 싶어 하는 그 부류 말입니다.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일부 홍콩인들이 불안에 떨면서 영제국 편을 드니까 사람들이 그랬었지요, 겉은 노란데 안이 하야니 ‘바나나’인가 보다고요.”
그래도 아시아가 서방의 저 거대한 적을 따로따로는 상대하기가 힘드니까, 뭔가 ‘블록’으로 뭉쳐 움직이면 더 낫지 않을까?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끼리의 시장, 우리끼리의 무역체제 같은 걸 한번 꿈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 수렌드라의 단호하고 예리한 답변은 내 이런 한갓 어린아이 같은 환상을 일거에 물리쳐버렸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시작되고 나서 미국이 자국 이해만을 강요하리란 걸 알고 유럽도 지역 내에서 양자 협정 같은 걸 따로 만들 생각을 했어요. WTO가 어떻게 관철됩니까? 이건 당사국들에게 다같이 효력을 발생시키는 조약으로서보다는 가장 힘이 센 국가에게 그보다 힘이 약한 국가를 상대로 ‘무역 보복’할 권한을 줌으로써 가동이 되요. 서구 강대국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체제에요. 미국도 나름대로 멕시코, 칠레 같은 국가들과 일대일 양자 조약 같은 걸 맺었습니다, ‘수퍼 301조’같은 법률로 보복하겠다고 위협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얻어냈지요. 유럽의 큰 나라들은 물론이고 나머지 나라들도 저마다 이 WTO란 체제가 말로는 ‘세계적인 무역 체제’라고 하지만 맹점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지역 내에서 이런 저런 양자 협정을 통해 움직였습니다. 모든 걸 WTO라는 바구니에 다 담고 그 바구니가 엎어지면 큰일이니까 조그마한 ‘딴 주머니’들을 찰 생각을 했던 거지요.
아시아 국가들도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래봤자 단속적이고 불안정한 조치에 불과합니다. 암에 걸려 다 죽게 생긴 사람이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격이지요. 암에 걸렸으면 암에 걸린 부위를 도려내거나 없애서 완전 치료할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WTO 무역 체제는 일종의 삼각 연합으로서, 한쪽에 미국이, 또 한쪽에 유럽 연합이, 나머지 한쪽에 일본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힘이 더 센 쪽이 힘이 덜 센 쪽에 강요하는 규범이 곧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규범이 됩니다. 유럽인들은 금융 차원에서 자기들이 달러 블록과 옌 블록 사이에 끼어있음을 알고는 재빨리 유로 블록이라는 대안을 찾습니다.
자,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 당신이 말하는 소위 ‘지역적 협력’을 통한 대안들의 역사적인 배경이라는 겁니다. 지역적인 연합을 말하기에 앞서 이 모델 자체를 우리는 완전히 뒤집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부터가 어려운 지점인데, 우리가 ‘무역’을 얘기할 때는 생산품뿐만이 아니라 돈의 움직임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오가는 거래는 실물 상품 거래량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하루 동안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돈의 액수를 다 합하면 이 세상 모든 국가의 모든 중앙은행에 예치된 돈의 총액과 맞먹으니까요. 대략 1조 5천억 달러 정도가 매일 교환되는데, 이중 5% 정도만이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과 관계된 것이고 나머지 95%는 환율 변동이나 이자 차등을 노린 투기 활동이에요. 이렇게 엄청난 돈이 이렇게 빠르게 오가면서 과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한국이 어느 날 민주주의도 발전했고 민중 대다수의 뜻을 따라서 이렇게 결정했다고 칩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사회 약자들을 위한 분배 정의에 충실한 공명정대한 경제체제를 갖겠다고. 그때부터 국제 자본이 드나들면서 결국 그것은 결코 가능한 해법이 아니라는 점을 한국 정부에 톡톡히 가르칠 겁니다. 80년대의 스웨덴이 마찬가지 공격을 받았어요. 스웨덴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80년대 내내 세계 거대 신문들의 총포화에 시달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국도 살기 위해서는 세계 무역 체제에 통합되어야 하고, 이는 즉 세계 금융 체제에도 통합되어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세계 금융 체제는 한국의 정치를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우파 BJP가 실각하니까 며칠 새 인도 주식시장이 80%가 넘게 하락세를 보였더랬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있기가 무섭게 한국 주식시장이 요동치는 걸 제가 매 15분 간격으로 확인한 바 있습니다.
무역은 상품만의 무역이 아니게 된지 오래됐습니다. 세계의 일년 무역량이 고작 3일치 금융거래 물량에 지나지 않아요. 지역적 연대를 말하기 전에 우선 이 세계 금융 시장의 위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금융 시장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아시아 지역 블록’을 얘기하는 건 한마디로 코메디라는 거에요. 세계 금융이 하루 만에 당신네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데 블록이 대체 무슨 힘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 블록이 달러 경제 바깥에 있나요?
따라서 지역적 협정을 얘기할 때는 화폐 협정도 반드시 같이 논의해야 합니다. 유럽인들은 길을 찾았어요, 공통 화폐 경제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미국이 줄기차게 그걸 공격하고 있지요. 세계의 부가 오로지 미국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쓰이고 있는 그런 이상한 상태에 지금 세계 경제는 와있습니다, 자유 무역은 결국 미국 무역적자를 다른 나라 재정으로 해소해주는 일에 다름 아니에요.”
가능한 해법이 그동안 다양하게 예시되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유럽에서 특히 유명한 프랑스 '금융거래과세운동연합(ATTAC)' 그룹이 제안한 '토빈세'*이다. 금융이나 환시세 차익이 너무 막대하고 이 시장 자체에 무슨 규제가 없으니까,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금융거래에 일정 비율로 세금을 매기자는 발상이라고.




“미국인들도 약삭빨라서 지역적 연대가 생기려고 하면 얼른 자유 무역 조치를 강요합니다. 80년대만 해도 무슨 '블록'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어요. 이건 모두가 지는 게임이에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더 큰 재난의 시초가 되는 현재의 이 세계 경제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든 '탈연결(delink)'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방식이 될지 나는 모르겠어요. 미국하고 무역을 덜 하기 시작한다든지. 미국은 거대한 시장이고 모두가 그 파이에 손을 대고 싶어 하지만 그건 상한 파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속을 썩고 병들게 하지요. 동아시아는 나름대로 지역 시장을 개척할 만 합니다."
나는 바로 그래서 동아시아의 지도자들이 툭하면 '아시아 블록'을 입에 담는다고 말했다. 동북아 '지역' 안에서라면 우리끼리만 교역해서도 앞으로 잘만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식으로. 수렌드라는 그렇더라도 미국은 가령 한국 같은 나라가 그런 '지역 경제' 속에서는 그 어떤 이득도 취할 수 없도록 알아서 조치할 것이라 대답했다. 레이건 정부 시절부터 미국의 다국적 쌀 생산 기업이 WTO 제재를 통해 긴 쌀을 생산하는 인도, 태국과 둥근 쌀을 생산하는 일본, 한국을 모두 어떻게 따돌렸던지를 상기시키면서.
저항의 시작: 비동맹(대안)의 발견
아시아는 서구로부터의 이 경제적, 정신적으로 가공할 부과를 어떻게 하면 뿌리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는 1955년 반둥 회의**에서 촉발된 제3세계의 ‘비동맹(Non-Aligned) 노선’ 표명을 예로 든다.
“반둥 회의가 열린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냉전으로 인해 세계가 두 쪽이 나다시피 했지 않습니까. 동서, 미소로 양극화가 빠르게 이루어졌고, 미국과 소련은 나머지 국가들도 어느 한 편을 들기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어느 쪽 편도 들고 싶지 않아했어요, 왜 우리가 꼭 어느 쪽에 가담해야 하느냐면서요. 아이디어는 반둥 회의 이전 바기오 회의에서 처음 나왔더랬는데, 수카르노니 네루(인도 초대 수상)니 하는 이들이 중요 입안자 가운데 일부였지요. 하여간 아프리카는 물론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이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이 비동맹 노선은 정치적일뿐 아니라 철학적인 개념도 함축하고 있어요. 즉 우리가 양자 외의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는 것,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어느 한쪽 아닌 제 삼의 대안을 내세울 수도 있다는 것.
인도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제3의길’을 적절히 추구해왔고 또 어느 정도는 성공했습니다. 지난번 총선으로 밀려난 BJP당은 물론 이에 반대해왔습니다만, 이들 소위 ‘신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건 뭐겠습니까? 핵심을 따져 들어가보면 서구, 특히 미국인들의 도구가 되고 싶어 하는 거에요. 왜? 국내적으로 볼 때 미국의 방식이 노동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덜 받게 하는 방식, 노동자들이 조합화하는 걸 막아줄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막으려면 뭔가 중간의 대안, 이를테면 (아시아) 지역적으로 어느 정도 자율적인 무역 시스템을 분명 찾아내긴 찾아내야 합니다. 지역 내에서 하나의 대안적 무역 모델을 찾아내고 그걸 운동으로 번지게 하는 것. 예를 들어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커피가 여기 한국 시장까지 오기 위해서 꼭 세계 시장을 거쳐야할 필요가 없거든요. 다국적 중간상이 생산지 커피가 잘 되도 이득이고 잘 못되어도 이득인 이 시스템 자체를 부숴뜨려야 합니다. 이 시스템이 강요하는 모델은 분명 몇몇 거대기업들의 독점 체제이니까요.
1997년 우루과이 라운드가 시작됐을 때 미국은 협상 테이블로 미 거대 다국적기업 CEO들을 내보냈어요. 이 CEO들이 곧 WTO체제 출범을 위한 세계 회의에 파견된 일국의 위원단이었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때 깨달았지요, 이 우루과이 라운드나 WTO란 것은 곧 세계 경제에 대한 다국적 기업의 지배라는 새로운 ‘초국화된’ 현실에 맞추려고 무역 규제와 법안을 다시 쓰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것들이 말하는 자유는 다국적 기업들이 무역할 자유이고 다국적 기업들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무자비하게 착취해먹을 자유였습니다. 어린애고 아녀자고 할 것 없이 한 뼘도 안 되는 더러운 공장에 가둬놓고 부리면서, 우리의 대지와 강물을 약탈하고, 우리의 평화를 약탈할 무제한의 권리 말입니다. ‘자유 무역’은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를 ‘강간’할 자유를 뜻합니다. 세계의 보편적인 법률에 의하면 강간은 중범죄에 해당하지요, 우리도 부정하고 또 저항해야 합니다.”
저항의 본질: 권력화(empowerment)로서의 연대
수렌드라는 그러나 “당분간은” 그 어떤 확실한 대안도 보이지 않노라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당분간 세계는 하나의 금융.경제 위기가 일련의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조치를 낳고 그 조치들은 다시 더 심각한 위기를 불러오는 그런 재난의 악순환을 헤쳐가야 할 것이다.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그는 반세계화를 외치는 숱한 집회들의 위험은 그 단속성이 미디어 조작에 물들어있는 전 세계 시민들이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라고 역설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저항의 형태를 그는 이런 예로 설명한다.
“작년 코스타리카에 있는 UN 평화대학에서 나한테 추천을 하나 부탁했어요, 거기서는 매년 지역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평화에 심대한 공헌을 한 국가나 단체를 뽑아 수상을 하거든요. 나는 태국의 ‘가난한 자들의 의회’ 운동을 추천했습니다. 실제로 상을 탔는지는 모르겠군요. 이 운동은 말하자면, 씨애틀보다 한 백만 배는 더 중요한데 미디어에 한 천만 배는 덜 비쳐져왔다고나 할까요? 제목 그대로입니다, 태국에 사는 ‘온갖 종류의’ 가난한 자들, 농부, 어부, 광부, 공장 노동자, 빈민촌 주민, 등등이 일종의 ‘의회’를 꾸려서 정부 청사까지 행진을 시작했어요. 이 사람들이 청사 앞에서 큰 시위를 벌일 때 내가 마침 방콕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조합해 ‘100가지 요구사항’을 만들어 낭독했습니다. 그들은 이걸 정부와 하나하나 타협해서 관철해나갔어요, 시간이 걸렸지요, 모여든 사람들이 잘 곳도 없어 그냥 길바닥에서 잤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아기를 낳기도 했어요.
가난한 이들이 길바닥에서 지내는 동안 사람들은 동정과 연대의 표시로 매일 쌀자루를 갖고 왔습니다, 나중에는 자루들이 이 방 천정 높이만큼 쌓였어요. 더 중요한 사실은 100가지 요구조건이 모두 다 관철되기 전까지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가령 어떤 어부가 자기가 제시한 조건이 목록 윗부분에 있어서 다른 조건들보다 좀 빨리 해결되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 어부는 집에 안가고 남아있었어요, 다른 어부들, 농부들, 노동자들의 조건이 아직 결판이 안 났으니까요. 이들의 이 끈질긴 연대는 결국 태국 내 댐 건설 계획 한 건을 좌절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진정한 의미에서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 연대의 지속성, 곧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문제들을 복합적이면서도 순차적으로 달려들어 해결해나가는 지구력, 그리고 그 과정을 과정에 참여한 또는 참여 가능한 자들의 놀라운 연대와 ‘권력화’(말 그대로 그들은 민중을 대변하는 ‘의회’가 된 겁니다)로 이끌어나가는 탁월한 방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허나 지금 누가 이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까? <시민의 신문>같은 대안 매체가 이런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운동들을 태국에 특파원을 파견해서라도 발굴해서 알려야 합니다. 세상에 이미 식상할 대로 알려진 사건들 뒤만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찾아내고 드러내고 연결하는 것. 대안 매체는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이런 운동들에 효과적으로 결합될 수 있습니다."

밑에서부터 허물기, 비정통화하기, 용해해 없애기
한국 운동가들의 맹점이랄까, 하여간 불공평한 전 지구적 체제를 더 공평한 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둥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둥 부르짖는 이들은 허다하지만 WB나 IMF, WTO 등이 실제로 어떻게 일개 국가나 지역에서 작용하는지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드물다. 정치적으로 타겟화하는 건 더 이상 길이 아닌 것 같다, 더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이런 지배 기구들은 뭐라고 봐야 할까?
"이들 기구들은 미국이 지배합니다. WB, IMF같은 기구와 UN이 다른 점은, UN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보편 선거권, 즉 '일국 일표' 원칙 위에서 움직입니다. 일국의 민주주의 원칙을 고스란히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이지요. 정반대로 IMF나 WB 체제는 '일 달러 일표' 원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가진 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표, 더 큰 결정력을 갖는 거지요. 따라서 WB과 IMF 안에서도 위계는 미국-유럽-일본 이렇게 됩니다. 권한이 지분에 달려있으므로 이들 기구들은 사적인 기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미국이 가진 지분이 가장 크기 때문에 미국이 동의를 해야만 뭐든 성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WB, IMF 등을 누가 책임 지느냐도 미국이 결정 해야만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 IMF 사무총장 임기가 곧 끝나는데, 유럽은 유럽인을 거기 앉힐 겁니다, 그게 일종의 룰이거든요, WB 총장은 미국인이 맡고 IMF 총장은 유럽인이 맡고 그렇게 분할합니다. 합의야 하지요, 그러나 그 합의는 엄연히 '백인들끼리의' 합의이고, 그들은 마치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 즉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움직입니다. IMF 총장에 왜 아시아인은 못 앉는단 말입니까?
전지구적 지배와 예속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IMF, WB는 일본에게 더 많은 분담금을 요구했고, 일본은 당연히 돈을 줄 테니 더 큰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본에게 표를 더 많이 주려면 그만큼 누군가에게서 표를 뺏어와야 합니다. 누구 표를 뺏겠습니까? 이런 논란이 IMF 총회 때마다 벌어집니다.
IMF, WB 등의 기구들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모순적입니다. 이들은 전 지구적 금융지배 체제가 되고자 하는데, 가령 한국이나 인도의 중앙은행처럼 말입니다. 보통 중앙은행들은 민주적으로 제정된 헌법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IMF는 전혀 그렇지가 않지요, 이미 지적했다시피 지분 따라 움직입니다. 따라서 논리대로라면 IMF도 중앙은행이나 마찬가지 시스템이 되도록 민주적으로 개혁을 해야만 하겠지요. 미국인들도 부분적으로는 이들 기구들의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장 손에 쥔 이득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 개혁을 늘 뒤로 늦추고 있어요.
자, 그럼 운동가 시각에서 볼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장 문 닫아버려야 한다고, 50년은 충분하다고요. 나도 물론 그랬으면 해요, 문제는..."
어떻게가 아닐까, 라며 내가 아마 조금은 성급하게 재촉했나 보다, 수렌드라가 고개를 살살 젓는다.
"아니, '어떻게'로 그렇게 훌쩍 넘어가버리지 말아요. 운동의 맹점이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어떻게,라고 묻는 순간 문제는 말 그대로 '어떻게 하기만 하면' 마치 이 체제가 금방 닫히거나 변화할 것처럼 고착되어 버리거든요.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통상 운동은 그저 닫자, 없애자라고 외치기만 할 뿐, 그게 실제로 최종적으로 닫힐 때까지 우리가 여전히 당해야 할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을 잘 안 하려 듭니다. 그것들이 아직 없어지지 않은 지금 우리가 그것들이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도록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뭐겠습니까? 그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고, 그것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지를 알고, 또 더 많은 이들이 거기에 대해 더 잘 알게 만들어서 그 사람들이 나중에 자기 나라에서 이런 기구들을 더 잘 개혁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 나는 바로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선정적인 투쟁 구호를 외치기보다는 뒤에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실천(commitment)'을 통해 보다 더 책임 있고 지속 가능하게 저항할 방법을 찾으라는 주문이었다.
"IMF, WB의 이사회는 각국 재무장관들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자이므로 전 지구적인 금융 기구들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원칙대로라면 민주적으로 일해야 합니다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요. 이유는 이들 기구들에 이미 불합리, 불평등, 방만한 경영, 비리 등 온갖 타락상이 만연해있기 때문입니다. 전 IMF 직원 데이비슨 부두가 쓴 <그만하면 됐다(Enough Is Enough)>라는 공개서한이 있어요. IMF 기구 내의 어두운 실태를 폭로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었지요.
닫고는 싶은데,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뭘 해야 하겠습니까? 앞에 나가 맨날 똑 같은 연설만 되풀이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실제 현실로 돌아가면 이미 WTO니 IMF가 우리 직장에, 우리 일상에 쳐들어와 있는데 어떻게 거부하고 어떻게 문을 닫습니까? 마이소르 농장으로 돌아가면 난 WTO와 '정말로' 씨름을 해야 합니다. 마을 농부들이 WTO 제재 조치들 때문에 실제적으로 입게 될 피해는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하면 피해갈 수 있겠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내게 자문을 구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봐야 이 WTO란 괴물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문제의 농부들 입장에서 예상 가능한 결과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것뿐이에요.
문을 닫자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실질적인 저항은 보통 사람들에 대한 매일의 (자기 약속에 대한) 이행으로 밖에는 불가능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들 기구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사람들을 늘 더 많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인도 기자 차크라바르티 라거반이 쓴 <재식민화>라는 아주 뛰어난 책이 있어요. 여기서 저자는 간디가 썼던 방법을 드는데, WTO, IMF 같은 기구들에 대한 저항을 생각하면 난 이 방법 외에 대체 다른 어떤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간디식 접근법이란 첫째, 저항하고 밑에서부터 허물기, 둘째, 저항하고 비정통화하기, 셋째, 저항하고 용해해 없애기 입니다. 저항하려면 저항하는 대상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요. 아까 언급했던 WTO 홈페이지에 있는 저 '10가지 혜택' 같은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자꾸 알아가면서, 이들 기구들이 서있는 기반이 그 얼마나 허약하고 웃긴 것인가를 자꾸 드러내야 합니다."
'웃기다'는 감정은 그 체제가 이미 '비정통화'되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고, 뭔가 어긋나있고, 이유를 알아봤더니 별 것도 아니고. '웃긴다'는 반응은 그런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용해해 없애기'란 아마 이 감정을 남들도 똑같이 느끼도록 만드는 과정에 해당하리라. 깨부수는 게 아니라 체제 자체의 모순으로 체제가 녹아버리는 것, 바깥 민중이 내부의 병든 요소를 감싸고 압도해서 결국 소멸시키는 것 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운동가들이 손쉽게 빠져드는 유혹 중 하나가 음모론인데, 이는 결코 도움이 못됩니다. 세계 역사가 꼭 음모 위에 구축되어온 것만은 아닌데, 사회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음모가 아니라 이해관계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힘이 센 이해가 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간디도 맑스도 각기 현대 세계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지요, 그들은 둘 다 그걸 해냈습니다. 맑스는 세계가 계급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는 걸 분석해냈고, 간디는 영제국이라는 거대한 식민'기관(machinery)'에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는 없으니까 그 기관 속에서 차이고 쫓기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사용할 만한 '가난한 자들의 무기'(이건 제임스 C. 스콧이란 사람의 책 제목이기도 한데요)를 끝없이 실험하고 만들어냈습니다.
음모론에 빠지면 악마화라는 유혹에도 빠지게 됩니다. 체니도 럼스펠트도 다 악마지요,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허나 이 또한 전혀 도움이 안 되는데, 지식인인 우리들이야 악마화를 위한 다채로운 언어라는 도구가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호사를 못 누려요. 일반 시민들에게는 운동가들의 악마화 하는 온갖 수사가 그저 단순히 우리가 실질적으로는 권력을 못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의 표명에 불과해 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서 그나마 있던 힘도 빼간다는 말입니다. 전지구적 지배 기구들에 싸우려는 목적은 애초에 우리와 민중을 '권력화'하는 것 아니었나요? 악마화 하면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하면 절대 권력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더 힘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아시아의 어려움은 남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먼저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는 어려움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서구 근대화 이론의 정전을 확립시킨 막스 베버(1864-1920)는 서양 역사가 성취했다는 합리화를 ‘정체’된 아시아에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에게 아시아는 그 체제 이념이 힌두교든, 불교든, 이슬람이든, 유교든 간에 서양이 이르러 있는 곳에 아직 이르러 있지 못한 부정성이었다.
이 아시아는 그러나 최근 아시아 전역, 특히 동북아 지역***에서 맹렬히 재발견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을 비교연구해온 쑨 꺼는 일본 전근대 사상가들의 정신 속에서 아시아는 방법적인 만남(번역)을 통해 다시 태어날 “사유 공간”임을 발견하고, 루쉰 연구자 왕 후이는 아시아가 이제 그 시효를 다한 듯 보이는 서양적 유토피아 이후에 열린 초월 세계, 루쉰 작품에 출몰하는 귀신들처럼 영원히 모순적이면서 “부단히 자아비판적인” 다양성이라 선언한다. 임지현과의 대중독재론 서간집으로 유명해진 일본의 사카이 나오키는 아시아가 오히려 그 역사적 상처를 갖고서 서구 제국주의와 또 언제든 그 제국주의에 편승할 위험을 내재한 민족주의를 동시에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토로한 바 있다.
로렌스 수렌드라의 이번 성공회대 겨울 강좌 역시 ‘아시아의 재발견’을 통한 대안 모색에 초점 맞춰져 있고, 그 시작은 서구의 렌즈에 들어가 틀 잡힌 아시아, 우리 안에 이미 내화된 근성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될 것이다.
수렌드라가 세계적인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인도 작은 농장의 농군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축복인 듯 하다. 그는 지식인들의 드높은 세상에 나가 강연을 하거나 할 때는 자신감으로 그득해 있다가도, 농장으로 돌아가 농민들의 현실을 대할 때면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사무치게 깨닫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더욱 그는 자신의 양극성, 이중으로 모순된 정체성(아시아인과 세계인, 지식인과 농부)을 어떤 식으로든 균형 잡아 나가야만 했고, 균형에 대한 그의 줄기찬 노력은 결국 현재의 그라는 한 독특한 운동가를 빚어냈다. 그는 제도(UN) 안에 있으면서 제도 바깥의 밑바닥 현실에 대해 비제도권의 그 어떤 운동가보다도 더 밝았고, 그의 시선은 전 세계를 향해 비상하면서도 내면의 혜안은 늘 아시아라는 아직도 생성 중인 혼돈 속으로 숙어들었다.
농부 철학가 노릇하기도 힘드시겠다고 농담 삼아 한마디 던졌더니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말란다. 굳이 원한다면 '유기적 지식인'이라 불러달라고 했다. "그람씨 표현인데, 유기 농업자인 나한테는 딱이지요."

레베카 김 객원 기자 rebecca@ngotimes.net

*금융거래과세운동연합(ATTAC, http://www.attac.org)과 토빈세: 금융시장 독재에 반대하여 1998년 창설된 프랑스 NGO, 무역조합, 언론사들의 연합. 이들은 1997년 12월자 <르몽드 디플로마띠끄>에 실린 이냐시오 라모네의 사설 “시장을 무장해제하라”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요지가 토빈세의 도입이다. 197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은 단순한 경제 정책을 넘어 자율적인 통제를 추구하는 정부를 구상하면서 특히 해외 외환시장에서의 모든 투기성 거래에 대해 적당한 세금을 부과하는 아이디어를 제출했다. "토빈세는 해외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고 국제적 공동체를 위한 자금을 증가시키기 위해 모든 금융거래에 적당한 세금을 물리자는 것이다. 0.1%씩만 물려도 1년에 대략 천 6백 6십억 달러를 획득할 수 있고 이는 다음 세기까지 전 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필요한 액수의 두 배가 된다." ATTAC은 대중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지역 대표그룹들에게 금융투기의 경제, 사회적 결과를 알리는 한편 국회, 유럽 정상회의, 다보스 회의, IMF 총회, 통상조약에 대한 협상 등에 ATTAC의 의제를 내세우고 있다. 현재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세계 15개 회원국의 함께 활동하고 있으며, 프랑스 ATTAC만 2만 6천여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
**반둥 회의: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9개국이 참가하여 경제협력, 문화협력, 인권 및 민족자결, 종속민족문제, 세계 평화의 증진 등을 토의한 회의로 일명 ‘아시아ㆍ아프리카 회의’라고도 한다. 이 회의를 계기로 비동맹 노선의 제3세계 또는 제3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이후의 아시아ㆍ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반둥 회의에서 결의된 ‘세계 평화와 협력의 증진에 관한 선언’, 이른 바 반둥원칙이라고도 하는 이 ‘평화 10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기본적 인권 및 유엔 헌장의 목적과 원칙의 존중 ② 국가의 주권 및 영토 통합의 존중 ③ 인종과 국가 간의 평등 ④ 내정불간섭 ⑤ 단독 혹은 집단적 자위권의 존중 ⑥ 집단 방위협정을 강대국의 특수 이익을 위해 사용치 않을 것과 내전(內戰) 불간섭 ⑦ 침략 및 침략의 위협, 병력 사용 금지 ⑧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⑨ 상호 이익과 협력 증진 ⑩ 정의와 국제 의무의 존중
***두서없이 쏟아져 나온 그간의 동아시아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세 가지 정도의 갈래로 다듬을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끈 최원식·백영서 교수 등 계간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론이다. 이들은 한반도 분단 체제를 푸는 작업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하고 서구적 근대의 진정한 대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함재봉·유석춘 교수 등이 이끈 ‘유교자본주의론’이다. 70, 80년대 일본과 ‘네 마리의 용’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자 서구는 기독교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유교 자본주의 개념을 만들었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결합으로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정경유착을 기반으로 한 아시아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셋째는 동아시아 문화론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다양한 담론들이다. 이들은 유·불·선과 한자문화란 공동의 경험을 가진 동아시아를 가정한다. 계간 <상상>의 편집위원 정재서 교수 등은 동아시아적 문화적 정체성의 발견, 전통문화와 현대성의 창조적 결합 등을 모색한다. 그 외에도 한국이 문명의 중심 노릇을 해야 한다는 시인 김지하씨의 동아시아 문명론 등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론의 역사가 지속되고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논쟁의 빈곤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동아시아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하고 있는가. 이보다 앞서 과연 ‘동아시아’라는 실체가 있는가.
-<한겨레21> 2004년 7월28일자, 유현산 기자의 <학술- 다시, 동아시아!> 중에서



서양 아닌 서양
‘아시아 발전/개발 비교론’ 하면 보통 대학에서는 두 대 이상 국가의 이미 통계수치화되어 있는 경제, 정치, 문화 등 여러 지표들에 대한 비교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성공회대(‘보통 대학’이 아니라서, 보통 대학에서는 가르치지 않고 또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에서 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학과 교육은 다루는 영역을 세분해서 전문화하기 때문에 ‘아시아’를 하나의 전체로서 접근할 길이 없다. 가령 전통 사회학에서는 ‘여성’을 안 다루는데, 이는 현실과 괴리되는 것이다. 현실 속의 우리가 이미 중층적이고 총체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따로, 경제 따로, 젠더 따로 가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학제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적으로 짜여져 있다. 모든 걸 서구 선진개발국의 경험을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도 구축되며, 그 정체성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불러올 거대한 어떤 격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회의 당하는 일 없이 존속된다. 내 예를 들면, 원래 화공학 전공인데 파리에 가서 사회과학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문제의 격변이 일어났다. ‘나라’라는 울타리 없이 휩쓸려 다니던 아시아인들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만나면서 우리 아시아인들을 그렇게 연결해준 서양의 모든 도시들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급진적(radical)’이란 말은 ‘뿌리(root)’란 말에서 나왔다. 나도 급진적이 되어갔고, 뿌리로 파고들어가 발견한 것이 ‘오리엔탈리즘’이었다. 여러분은 당연히 사이드의 역작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에드워드 W. 사이드의 78년 작 <오리엔탈리즘>을 나중에 같이 살펴볼 것이다.
이 ‘아시아 개발 비교론’이란 명칭에 대한 통상적인 반응 또한 서구적인 기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번 지적하고 싶다. 이에 반해 우리의 작업은 비교적으로 접근 하되, 그것이 역사적인, 의식에 대한, 정체성(자기와 타자의 대립으로 형성되는)과 공동체에 관한 비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나는 …이 아니다’로서의 정체성 형성은 아시아를 논할 때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즉 아시아에서 개발은 자기 충족적이고 긍정적인 과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경제, 사회에 대한 일반화된 지표들(국민 일인당 소득, 광역 인터넷 보급율, 등등)보다는 실제 삶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지표들(취학 아동 수, 식량 자급율, 등등)을 다룰 것이다. (사진 왼쪽: 열강하고 있는 로렌스 수렌드라 교수)
근본적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으로 아시아를 비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종류의 문제가 발생했느냐이다. 어떻게 아시아는 ‘서양이 아닌 서양(적 사고, 근대화, 등등)’으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거기에 자신을 동일화시킬 수 있었는가?

살필 문제들

첫 두 강의는 주로 ‘유럽 이전의 아시아’(11,12세기)에 초점 맞춰져 있다. 유럽이 붙여준 이름인 오리엔탈리즘의 뿌리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후 유럽중심주의(16세기)로 가속화되는 정신적, 문화적인 편향들 말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중동(아랍지역)에 대한 유럽의 개입과 함께 빚어져 온 개념체계로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두려움, 배척, 증오관계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근대화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근대화, 서구화로서의 근대화, 근대성, 문화와 전통(특히 1900년대 동아시아에서), 모델로서의 유럽 등등. ‘서구화로서의 근대화'를 뛰어넘기 위한 모색은 특히 20세기 초부터 일본, 중국, 인도 등에서 중요한 논점이어왔다. 한국도 별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같이 읽어볼 텍스트는 루쉰의 동생 저우쭤렌(周作人,1885-1967)의 세계를 다룬 수잔 다루발라의 <저우쭤렌과 근대성에 대한 중국의 대안적 대응>이다. 저우쭤렌은 5-4운동 당시의 개혁적 사상가들과는 달리 ’국가 재건‘을 둘러싼 근대화의 틀 바깥을 성찰하고자 했던 지식인이었다.  
이에 이어 살펴볼 것은 식민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등의 문제이다. 1,2차 대전 이후에는 냉전, 독재, 근대화 개발 등의 문제가 불거진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이거다: 우리는 이제껏 우리 자신을 반추해본 적이 없다는 것. 아시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이 외부로부터 왔는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왔는지, 우리의 의식이 그동안 어떻게 개발되어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  

세계를 개념화하기
첫 강의들을 통해서는 앞으로 우리의 탐색을 이끌어줄 개념적인 구조물들이 여럿 도입될 것이다. 이 첫 단계는 사회과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활동가’들은 실천만을 중요시하고 이들 개념들의 중요성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못된 습관이다. 좋은 실천은 좋은 개념화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 제대로 잘 파악할 수 없으면 제대로 잘 싸울 수도 없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는 그냥 세계가 아니라 ‘개념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세계라는 혼란 덩어리에 순서, 논리, 의미를 주는 것, 개념화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활동가라면 더더욱 세계를 개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모든 개념에는 역사, 그리고 논리가 있다. 특정 논리의 형성에 대해 알고싶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된다. 이것이 우리의 방법론이 될 것이다. 아시아는 ‘서구가 어떻게 아시아를 보아왔는가’라는 역사적인 질문이 되어야 한다. 즉 아시아,라고 할 때 그 아시아는 오리엔탈리즘과 유럽중심주의가 본 아시아, 서구가 아시아, 중동, 이슬람에 개입해온 역사로서의 아시아인 것이다.

유럽 이전의 아시아
‘유럽 이전의 아시아’는 그럼 무엇이었나? 유럽 이전의 아시아는 주로 ‘자국 숭배(glorification)’ 일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보수 반동적이고 우파적, 민족주의적 시각에서의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숭배 말이다. K.N. 쇼다니가 그런 걸 다뤘는데, 가령 일본은 서구화되면서 자신들이 왜소화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자꾸 과거로 거슬러 오르려 한다. 인도의 보수 우파 BJP 당도 마찬가지로 힌두 전통과 역사를 장엄하게 되살리려 한다.


문제가 아시아가 유럽 이전에는 더 행복했느냐 아니냐는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는 갈등 요소가 존재하고, 아시아-유럽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동방도 서방도 존재론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 둘은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과 작업에 의한 산물이고, 불안정한 관계 속에 늘 움직이는 과정인 것이다. 이 두 개념의 의미는 늘 변화하며, 현재 그 의미는 미국의 급속한 제국주의화와 함께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

‘장기 지속’의 역사

유럽 이전의 아시아를 논할 때 유용한 방법이 바로 역사를 길게 보는 것, 서구화나 자본주의의 역사를 근대로 한정하기보다는 인류의 전역사상에 끊임 없이 형성되어온 역사로 확대해 보는 것이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세계 체제’ 관점,  임마뉴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아날 학파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 지속’ 개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유럽 이전의 동양’에서, 동양-서양 관계는 주로 무역 관계였다. 유럽 이전의 동북아는 유교가 지배했고, 인도에는 통일된 역사가 없었다. 인도는 주로 향신료를 영국에 수출했는데, 영국은 나중에 교육 시스템을 인도에 도입했다. 겉은 거무튀튀한데 속은 흰 ‘코코넛’을 양성해내기 위해서다. 서구 편향적인 홍콩인들을 ‘바나나’라 한다면 서구 편향적인 우리 인도인들은 흔히 ‘코코넛’이라 불린다. 일제시대 한국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잘 될 것이다.

아날 학파와 장기 지속의 역사
아날학파(Annales School)는 1929년 프랑스에서 창간된 <사회경제사 연표(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라는 정기간행물과 함께 탄생했다. 당시 이 잡지에 기고한 역사가들은 정치사, 시대사에 치중하는 당대의 역사 서술에 반기를 들고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인류학, 지리학,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 등)의 방법론적, 철학적 융합으로부터 보다 더 넓고 인간적인 역사를 그려내고자 했다. 특히 공동 창설자인 마르크 블로흐(아래 왼쪽 사진)은 역사란 시간을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고찰하는 학문이라고 여겼다. 인간생활의 요소들 사이에 인과론을 설정한다든가 그 차이를 선조적인 '시대'로 병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동시에 전개되는 인간생활 전체를 종합하는 행위를 역사라고 본 것이다.
아날 학파는 따라서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의 제 요소를 인위적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장기 지속, 일상사를 쫒아가는 사회적 역사, 심성사, 의식양태 등 역사를 새롭게 서술하기 위한 범주들을 키워냈다. 맑시스트 사관과는 달리 경제보다는 지리환경을 더 강조했다. 이후 시대 저변을 흐르는 문제틀, 권력의 표현이자 수단으로서의 지식에 다름아닌 담론 등으로 서구 역사를 해부한 미셸 푸코라든가 상이한 경제, 정치 형태들을 '세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결과적으로 맑시즘을 현대화한 월러스틴(아래 중간 사진) 같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세대인 뤼시앙 페브르, 마르크 블로흐, 에른스트 라브루스의 뒤를 1940-50년대에 2세대인 페르낭 브로델(아래 오른쪽 사진)이 이었고, 제3세대에 해당하는 조르주 뒤비, 자크 르 고프, 엠마뉘엘 르 롸 라뒤리, 로제 샤르티에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무역 뿐만 아니라 복잡한 지적 과정을 통해서도 이식된다는 것이다. ‘유럽 이전의 아시아’를 논하려면 첫째 경제(자본주의), 둘째, 문화(지적 과정), 셋째, 정체(state: 정부와 통치의 복합, 이로부터 ‘국가’ 개념이 확립된다), 이 세 차원을 모두 살펴야 한다. 여기에는 또한 ‘그때 아시아는 아마 그랬을 것’이라는 식의 상상도 많이 요구된다.

정체됐거나 뒤떨어진 아시아
서구 지식인들은 이 긴 지속의 아시아를 두고도 마찬가지로 유럽중심주의적으로 사고했다. 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시아를 “전제정”이라 요약했고 여러 면에서 정체되어 있거나 뒤떨어져 있다고 파악했다. 헌데 사실을 파고 들어가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맑스가 서구와 비교했던 당시의 아시아는 나름의 부, 나름의 정치적인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에드문트 리치의 책에도 나오는데, 그는 캄보디아 왕국의 부와 잉여를 앙코르와트 같은 풍성한 기념물들의 원동력으로서 분석했다. 아시아는 지방 호족들과 ‘아시아적 정체들’이 비교적 길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흔히 중앙 정부와 자율적인 시민계급 둘 다 미발달되어 있었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교회와 그에 결탁한 영주들이 영국을 지배했고, 이들은 수 없이 많은 전쟁을 거쳐 하나씩 소멸, 지금의 국가를 이루게 된다. 동양의 나라들도 마찬가지 과정을 통해 국민국가(nation-state)가 되었다.
왜 자본주의가 서양에서만 융성했느냐는 베버 식의 질문에 대해서도 식민주의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능하다. 이 식민주의는 ‘아시아를 “아는” 유럽’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유럽 이전 아시아는 정신문명 뿐 아니라 그 물질문명에 있어서도 서양을 능가했다. 증기기관은 17세기에 발명되어 나왔고, 직물, 향신료, 차, 동식물 등의 무역 면에서도 유럽을 압도 했다. 유럽이 처음 아시아에 관심 갖게 된 이유도 이것이다. 아시아는 늘 유럽이 갖고 있지 못한 것들로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서양은 동양의 것을 훔쳤고, 훔치기 위해 처음엔 와서 배우는 척 했다.  

지식은 권력관계이다
유럽은 아시아를 “앎”으로써 권력자가 되었고, 이는 지식이 다름 아닌 ‘권력 관계’이라는 사실을 예시한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같이 읽을 터키 학자 하이켄 제이르의 <유럽과 이슬람>은 오래 전에 나온 책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상당 부분의 역사가 현재도 되풀이되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는 유럽/기독교가 이슬람과 맺어온 관계였고, 그로부터 생성된 이미지들이었으며, 이것들이 유럽 오리엔탈리즘을 이루었다. 이 유럽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은 이슬람이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스며들었고, 이것은 다시 서방의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강화했다. 이 과정이 현대세계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조건으로 아직도 작용한다. 오리엔탈리즘이 현대 세계의 ‘이슬람’이라는 지식 체계 덩어리를 인식하는 데 필수적인 형태이자 조건이 된 것이다. 유럽이 이슬람에 대해 한 짓, 다시 말해: 1) 십자군 전쟁으로 싹쓸이  2) 이후 서서히 진행되어온 통제와 잠식이라는 두 가지 대응이 유럽이 그동안 이슬람을 대면해온 방식인데,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제이르의 <유럽과 이슬람> 서문과 다루발라의 <저우쭤렌과 근대성에 대한 중국의 대안적 대응> 서문을 읽어볼 것이다. 후자는 언급했듯이 1900년 경부터 중국에서 벌어지는 논란 중 하나인 ‘중국을 위한 중국만의 근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다. 단순히 ‘서양식 근대화’의 비판 뿐만 아니라 ‘다른 식의 근대화가 과연 가능했는가’라는 더 심층적인 질문을 건드리고 있다. 이 ‘서양식 의미에서의’ 근대화라는 문제는 한국이나 인도에서도 주된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우린 모두 식민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는 또한 ‘亞서양’을 표방한 일본의 근대화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서구의 팽창과 동양의 대응
  
지난 시간 우리는 ‘아시아 개발 비교론’이라는 통상적인 범주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비교론이라고 확실히 못 박기 이전에 ‘비교’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와 관련된 회의적이고 생산적인 작업을 지향하기 위해서다. 비교가 근거해 있는 여러 개념들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구축에 의한 것으로서, 그것을 만들어낸 사용자의 도구일 뿐이다. 아시아 국가, 아시아의 역사를 구성하는 의식의 형태들은 서구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데도 우리에게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진다. 서양이 오랫동안 정형화해온 ‘동양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우리는 바로 그런 ‘자연화된’ 이미지들을 문제 삼을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서구 대 이슬람'의 구축

아시아의 반대편에 아시아를 구성하는 서양(유럽, 미국)이 있다. 양자의 관계는 초기 유럽의 역사가 아시아를 규정하는 방식이자 아시아를 조건화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시간에 따라 이 관계는 복잡해져갔고, 그 복잡성은 다시 양자를 변화시켰다. 이 관계 양상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유명한 저작 이후 ‘오리엔탈리즘’이라 불리고 있다.
나는 서구가 구축한 신화를 깨는 데 중요한 것은 사안을 ‘역사적으로’, ‘길게’ 보는 것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한 바 있다. 유럽 이전의 아시아에서는 인도, 중국, 오토만 제국 등 몇 개의 거대한 경제 체제들이 이미 세계 무역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역사에 대한 이 ‘긴’ 해석은 유럽중심주의를 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브로델, 월러스타인 등 ‘장기 지속’을 통해 지역간 관계 양상을 추적하는 방식은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가 세계를 조건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기독교 유럽과 여기 맞서 거세게 일어나던 이슬람. 이 둘의 관계가 오늘날의 세계를 조건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문제의 출발점이다.
사회과학이란 게 원래 그렇다, 서구에서 발전했고, 유럽중심주의의 틀 바깥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이 기존의 사회과학을 한번 뒤집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지정학적 이해인데, 여기에는 과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과정이 없다는 것은 곧 역사와 맥락이 없다는 뜻이고, 역사에 대한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지정학적 이해는 가령 현재 미국이 가장 힘이 센 강대국이므로 이 현실의 위계에 어떻게 적응해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 반대로 ‘미국은 과연 어떻게 해서 오늘날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나’하는 질문이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지정학은 권력관계의 현재성에 머물러 있다. 미국 학계가 그러하고, 한국은 특히나 지식 영역과 교육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다. 이는 사실 유럽에 가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유럽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위치 아닌 개념으로서의 아시아

아시아란 무슨 의미인가? 이는 지리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말일 뿐 아니라 구성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개념이다. 아시아를 아시아만으로서 가능해질 어떤 위치에 갖다놓는 일,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긴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아시아를 하나의 대상, 하나의 자율적인 의식 공간으로 구축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왜,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 다른 것으로 사고한다는 말인가?
이는 근본적인 것을 의심하고 파헤치는 작업이다. 마치 페미니스트들이 ‘자기들만의 언어, 문학, 이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왜?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의식과 관찰의 세계마저 이미 남성우월주의적인 언어, 문학, 이론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반 서구주의가 곧 민족주의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바라는 게 무슨 종교적인 ‘구원’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민족주의가 우릴 구원하지는 못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1976년 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좋은 또는 나쁜 이유로 유명해진 책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낳은, 지금까지 36개국어로 번역된 이 유명한 책이 2003년 다시 나왔는데, 9/11 이후의 재발간이라 사태와 관련된 서문을 타계 직전의 사이드가 써서 실었다, 필독을 권한다.
9/11은 인간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 ‘리오리엔탈리제이션’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슬람의 대응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부시 행정부나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한 타자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근본주의적 속성을 드러냈다.

오리엔탈리즘이 존속하는 현실의 세 측면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살피면서 그만의 독특한 방침을 낳게 만든 현실의 세 측면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첫번째는 순수한 지식과 정치적인 지식의 상이함에 대한 현실에 팽배해있는 믿음이다. 그는 이와는 달리 (미셸 푸코를 따라) 지식을 권력 관계로서 생각했다. 권력 구축의 일부로서 기능하지 않는 지식은 없다. 이 관점에서 그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지정학적인 지식을 미학적, 학문적, 경제적, 사회학적, 역사적, 문헌학적인 텍스트로 ‘배분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두번째는 방법론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인데, 사이드는 지정학적인 이해만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을 관찰하기가 어렵고 역사적인 이해, 바로 상이한 철학들과 사고체계들의 역사로서의 철학이라는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번째로는 개인적인 차원인데, 미국에서 성장한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저자 개인의 삶과 연관이 있다. 그는 동양인들의 삶을 강력하게 지배해온 서양의 규율이 그라는 한 인간 위에 새긴 흔적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유년에의 향수는 사실 모든 인간이 저마다 갖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도 이 향수에 기반해 있고, 그래서 그토록 매력적인 것이다. 시초의 고향을 꿈꾸는 이 애틋한 갈망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잘 그려낸 아미타브 고쉬란 인도 작가가 있는데, 사회과학에 이바지하는 문학으로서 나중에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다른 이해와 관련된 겹겹의 정체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니 민족주의니 식민주의니 하는 제반 이데올로기들도 결국 이 상이한 이해관계들의 산물일 뿐이다.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보면, 우리는 모두 이주자들이다. 한국인이니 중국인이니 하는 민족적인 표식이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사이드가 끼친 영향은 실로 방대하다. 그는 평생 오리엔탈리즘을 설파해왔으면서도 단 한번도 민족주의에 빠진 적이 없고, 팔레스타인 재건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쇼비니즘에 빠진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반유태주의는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의 핵심은 늘 휴머니즘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휴머니즘’하면 대게 서구의 그것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그는 간파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휴머니즘을 유일하게 추구 가능한 보편주의로서 끝까지 시야에서 놓지 않는다.
보편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면 서구가 말해온 것 중에 오리엔탈리즘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교황이 단지 이슬람 문화가 강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터키의 EU 가입을 반대한 바 있는데, 이는 기독교라는 ‘보편적인 종교’의 지도자가 가진 편견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고, 서구가 보편지향적이고 인도주의지향적인 지역이라는 신화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다. 나중에 터기 작가  파뭌의 <눈>이나 <내 이름은 레드>같은 훌륭한 소설들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그는 전통과 얼마나 결합되어 있어야 하나, 또 유럽과는 얼마나 가까워야 하나 등과 관련된 터키 지식인들의 흔들리는 갈망을 잘 그렸다.

첫 번째 텍스트 강독 - 유럽과 이슬람

이제 하이켄 제이르의 <유럽과 이슬람> 서문을 같이 읽어보겠다.

“그 근원이 순전히 지리학적인 한 개념을 그 근원이 순전히 종교적인 다른 한 개념과 연관 짓는 이런 비교 학문을 대체 어떻게 정당화해야 할까?”: 첫 단락이 이슬람과 유럽을 도대체 왜 비교하느냐고 묻고 있다. 하나는 종교적(이슬람)이고 하나는 지리적(유럽)이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은 그 경계를 훨씬 넘어 뻗어있다. 지리만이 아닌 지식을 두고 말하면, 유럽은 미국, 호주, 심지어는 소련에게 역사적인 모태가 된다.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유럽의 발견과 성취들은 근대적 기준을 세웠다. 반대로 정치적으로 유럽은 확장하지 않고 원래의 자기 자신으로 물러나, 제한적이면서 특별한 자기만의 정체성을 구축하려 애쓰고 있다. 그것이 그것 바깥으로 투사하거나 정복했다가 부정해버린 다른 모든 것과 자신을 서로 구별해줄 특징들을 근본으로 하는 정체성 말이다.”: 유럽이 확장되어 나간 지역과 그 확장의 의미를 짚고 있다. 유럽은 단순한 국경의 의미 그 이상이다. 유럽은 근대의 기준이 되었다.
“이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인 단위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원래 서기 800년에서 850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만 적용된다. 이슬람은 사실상 그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똑 같은 강렬함으로 유지하는데 성공해본 적이 없다. 하나의 정치적 제국으로 단일한 응집력을 과시하던 시기(우마이야드족 지배시기)에조차 이슬람은 하나의 종교로서 승리한 아랍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다른 사회는 이슬람 원칙이나 문화에 침윤당하지 않았다. 그 응집역이 하나의 문화, 믿음, 공동체로서 큰 힘을 발휘하던 때에도(10-12세기) 이슬람은 지역 곳곳에서 고유의 문화가 다시 발흥함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붕괴하고 있었다.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도 그 신앙과 또 더 넓게는 그것과 연관된 삶의 방식을 퍼뜨리기 위해 자신의 원래 중심부를 떠났다. 이는 인도네시아, 중국, 북인도, 소아시아, 발칸 반도와 검은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지리적인 영역 개념 이상으로 확장되어 나갔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은 지금 세계의 리더 격이고, 이슬람 또한 세계에 편재해있다. 그 다음 문단이 이를 좀 더 설명하고 있는데, 유럽은 하나의 역사적인 문화, 위대한 문명으로서 오로지 이슬람에게서만이 그 상동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는 중국(또 다른 위대한 문명의 상징으로서)에게서.
“현대세계에서 이슬람은 종교적인 믿음으로서만 묶이고 유럽 또한 어느 한 장소에서 그 문명 양식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슬람과 유럽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문화들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적 주체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 이에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 첫 문단이 지정학적 관점은 이 둘에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문화’는 개별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국가의 문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예를 들면 ‘인도 문화’란 것은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보통 하는 식으로 문화를 이념적으로 규정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가령 한국 문화는 곧 ‘보수적인 문화’라는 등식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보수적이니 진보적이니 하는 이런 규범적인 해석은 오로지 관찰자의 특정한 세계관에서만이 가능하다. 보수는 뒤/과거를 보고 진보는 앞/미래를 향하는데, 이는 곧 유럽중심주의의 선조적(線條的) 역사관의 산물이다. 역사가 정해진 미래의 목표를 향해 곧바로 진행해간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4페이지 세 번째 문단은 무슬림들이 유럽의 성공에 매혹 당해 방향을 상실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 방어 차원에서 유럽을 나름의 색깔로 색칠하고, 거부하고, 모방했다. “그러나 무슬림이 전 세계 정치, 경제 상에 다시 부상하고, 유럽?미국 세계가 그동안 자신들과 자신들의 산물 사이에 놓은 거리(스스로의 합리성을 회의할 수 있도록)가 알려지고, 또 역사에 뿌리 내린 이슬람의 문화 의식과 근대성을 성취시킬 도구 간에 대담한 융합이 이루어지면서(이집트, 이란), 이슬람을 어떻게든 보호해야겠다는 방어의식이나 이와 관련된 문제를 한 물 간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10 여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은 사정이 좀 다를 수 있다. 특히 9/11이후 무슬림은 다시 자기방어를 향해 급속히 일원화되고 있고, 정치적인 이슬람도 형성되었다. 5페이지 두 번째 문단도 이슬람이 붕괴할 거라는 공포감이 잦아들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날 그 공포는 이슬람을 강하게 다시 엄습하고 있다. 정체성 강박, 근본으로부터 잘려나갈 것이라는 두려움, 등등.
6페이지 첫 단락: “세계가 더 일원화하면 할수록, 상이화, 내적 구조, 한 두개의 지배적 축 주변에 응집하려는 성격 등은 더 강해진다. 이것이 일어나면 “비?유럽”(라루이의 표현을 빌자면)로부터의 어떤 세대가 매개자로 작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유럽과 이슬람의 문화적 동일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는 세계화 문맥에서 다시 한번 음미해볼 만 하다. 동일화 될수록 달라지고자 하는 욕망은 오히려 더 커진다. 오늘날 빈발하는 세계화에 대한 반발들을 생각해보라. 아니, 동일화에의 거센 열망부터 생각해보라. 미국은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할 것을 요청했고, 한국은 이를 응낙했다. 이는 명백히 ‘이라크는 구원받아야 하고 재건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요청 하에 우리 모두가 동질화된 경우이다. 그들이 말하는 그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당연히 차이에 대한 갈증을 불러온다.


물론 그 대응이 늘 옳을 수만은 없다. 태국의 이슬람이나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를 예로 들면, 이들은 서구에 대응하여 자기를 규정하기 위해 서구로부터 도구와 용어를 빌려 왔다.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그들의 답이었다. 양적 평등의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로 사고한다. 여성이 남성을 흉내 내어 같아질 수 있다고 보고 또 사회의 권력을 나눠 갖기 위해서라도 남성과 똑같이 되기를 바라는.
두번째 단락: “(비유럽의 매개자들은) 기술 아닌 역사와 철학으로 무장한 비판적 지성의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합리성의 유럽적 범주들을 심판대에 올려놓을 필요는 없다. 그들의 역할은 그보다는 유럽적인 경험 전체를 다른 규범, 다른 가치, 다른 범주들로 가져가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에 있다.”
우파 민족주의에 맞닥뜨려졌을 때 우리는 통상 서구의 근대 기술이나 발달된 문명 등을 근거로 반박한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인터넷과 대립된다는 식의 구도로 몰고 간다. 그러나 서구의 기술만이 우리로 하여금 ‘근대적’이 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비판적인 지성, 역사와 철학으로부터 그 양분을 제공받는 비판적인 지성만이 길인 것이다. 서구의 합리성을 무조건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유럽은 이성, 합리성의 강한 전통을 낳았으며 이는 나중에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유럽의 경험들을 다른 규범과 잣대들 아래 드러내는 것이 중개자인 우리가 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20세기 전반 아시아를 집어 삼킨 민족주의의 광풍에 대항하여 타고르가 한 일이다. 유럽의 경험을 들여다보고 반드시 유럽 보편주의일 필요는 없는 그런 보편주의를 창출해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본문으로 넘어가자. 9페이지 제 1장 ‘중세 관념에서 근대적 관념으로’를 읽겠다.
사이드는 문헌(특히 문학)의 방대한 집적과 계열적인 독해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을 살폈다. 역사가 꼭 정치적 의미에서의 역사일 필요는 없다. 문학(쓰여진 것들의 총체)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리엔탈리즘을 탄생시킨 것은 동양을 지배하기 위해 동양을 알아야 했던 독일, 프랑스 등의 인류학이 남긴 방대한 양의 지식/관념 체계였다. <오리엔탈리즘>의 서문 역시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간의 관계를 먼저 살피고 있다. 이 관계의 첫 번째 정점이 십자군 전쟁에서 주어지며, 8?10세기에 걸쳐 서구에 형성된 이슬람에 대한 이 오해가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늘날 세계가 이슬람을 보는 눈을 형성했다. 이슬람도 그걸 받아들였고, 이 자기동일화는 다시 서양의 시각을 강화하면서 천년 이상을 살아온 것이다. ‘침략’의 상징화가 일어난 것. 한국을 예로 들면,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아마 중국과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이 대단히 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인도에서도 이슬람의 침입과 700년에 걸친 무굴제국의 지배를 힌두 민족주의는 일종의 ‘상처’처럼 가르친다.
근대 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동양 사회는 당연히 불안정했다. 쿠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면 봉건 시대 일본 사회의 혼란상이 잘 그려져 있다. 유럽은 동양을 그릴 때 바로 이점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럽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유럽을 근대 국가나 근대성의 상징으로만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근대국가 형성 이전의 유럽도 근대 이전의 아시아나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사회였다. 전쟁은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이었고 여성 약탈은 권력을 뻗는 수단이었다. 그 불안정한 서구 사회가 거듭되는 위기 속에 치러내야 했던 이슬람과의 전쟁 경험은 유럽인들의 심상 깊이 각인되었다.



11페이지 ‘서양: 적대감과 논란’의 첫 단락: 십자군 전쟁에서 중요한 사실은 폭력은 아랍 것만이 아니었으나 아랍만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아랍의 폭력적 침입에 대한 유럽의 원초 경험’을 형성하는데, 이 경험은 근본적으로 적대감에 뿌리박고 있다. ‘이교도’들의 약탈의 역사가 이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이킹은 아일랜드까지 침략했었다. 그러고 보면 ‘이교도’란 것도 서구적인 개념이다. 폭력은 어디에나, 어느 민족에게나 광범위하게 존재해왔다. 특정 문화나 종교 아래 분류, 귀속될 것이 아니다.
12페이지로 넘어가자. 첫 두 단락은 유럽 문명 발달사에서 중세 이슬람이 과학 문명의 중대한 공헌자임을 얘기하고 있다. 수학, 천문학, 철학 등에서 이슬람은 뛰어난 업적을 이뤘다. 서구는 이 성취와 이슬람의 가치에 대한 평가 양자를 서로 분리해서 사고했고, 이슬람 고유의 인종적, 문화적 체계는 무시되었다.
진리는 유일하지 않다: 문화와 종교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의 중요성
13페이지 세번째 단락은 12세기 얘긴데, 현대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부시와 그를 추종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을 생각해보라. 기독교도 이슬람도 모두 단일신적이다. 그 단일신교는 확대해보면 진리는 유일무이하다는 사고이다. 현재 두 단일진리교가 서로 맞부딪고 있는 상황이다. 기독교도 이슬람도 다 특정 지리학, 생태학 위에 건설되어 있다. 기후를 비롯한 제반 자연 조건이 만들어낸 상황들 말이다. 특정 자연은 사회 건강을 위해 특정 공중보건 양식을 만들어내고 또 규범화한다.
오리엔탈리즘은 모두 자연을 끌어들인다. 어떤 에코 페미니즘은 신오리엔탈리즘이나 마찬가지이고, 인도의 반다나 시바도 이런 공격을 자주 받는다. 유럽이나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에는 이 자연이 빠져 있는데, 자연은 그 모든 걸 조건화하고 특정 정치문화가 생기하고 발달하게 결정하는 인자이다. 지식도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가령 한국에서 음식에 대한 지식은 특정한 한국적 자연, 지리, 생태, 기후 조건들에 맞춰져 발생한 것이다. 저장문화에 다름 아닌 김치를 생각해보면 잘 알 것이다. 이슬람도 기독교도 그들의 삶의 조건의 산물이라는 상대적인 인식이 중요하다. 인도의 경우는 유일신이란 개념이 애초에 가능하지가 않다. ‘힌두’라는 말조차 포르투갈어로서, 인도는 힌두 중심마저도 아니다. 자연 환경이 지나칠 정도로 풍부해서 ‘공포’의 경험도 다양했다. 자연히 다양한 신을 창출했고, 따라서 신도 여신도 모두 자연현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들을 낳은 조건인 환경적 조건에 일치하는 일정한 진리/지식을 재현/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각각 ‘더 큰 진리’의 일부분(인 진리)이 된다. 서구의 이성, 합리화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봐야할 것이다.
같은 페이지 마지막 단락: 같은 영토(같은 사막 지방, 같은 유일신 관념)를 두고 싸워온 서구의 이슬람에 대한 편견은 결국 무슬림적인 영혼이라는 ‘의사?예언자pseudo?prophet’ 상을 낳았다. 무슬림 예언자는 본능적인 자기 억제가 가능한 신성한 행동(기독교적인)의 대척점에 있었다. 이어지는 무슬림의 여러 속성들. 그들의 천국 개념은 물질적이고 환락적이어서 정신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으며, 일부다처제는 무슬림의 악덕이고 나쁜 섹슈얼리티의 예이다. 사람을 여성화하고 약화시키는데 이는 서구적인 남성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다. 인종의 성적인 성격을 유럽은 재구축했다.
세번째 단락: 이슬람의 이미지는 그리하여 폭력, 난폭, 사나움, 방탕함, 무절제 등으로 응집되어 결국 인간/종족 자체의 결함의 증거로 변화했다. 사실 십자군 전쟁에서 더 잔인하고 난폭하게 행동한 쪽은 유럽이었다. 그러나 역사상 유럽의 십자군은 ‘난폭’한 이미지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럽은 타자의 난폭성을 먼저 구축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난폭함을 가릴 수 있었고, 그 위에 자기의 난폭성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자와 자기의 이 이기적인 구축의 과정은 유럽의 이슬람에 대한 관계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가령 인도에서도 우파 힌두이즘은 똑 같은 방식으로 이슬람을 구축해왔다. 2차대전 당시의 파시즘도 마찬가지이다.
이 ‘구축’작업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종교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인은 ‘난폭하다’는 이미지는, 지난 3월 대통령 탄핵 당시의 반대 집회를 직접 가 본 사람이라면 아마 부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나는 거기서 세상에서 가장 질서정연한 데모, 높은 차원의 시민사회 문화를 경험한 바 있다. 리콴유가 인도인들은 “혼란스럽다(chaotic)”고 했다. 이 형용사가 과연 ‘인도인들’이라는 집합명사 아래 귀속될 만한 것인가?
16페이지: 유럽에서 기독교가 유일한 이념적인 지위 상실하면서 이슬람도 원초적인 적(敵)이미지를 상실했다. 그러나 ‘이슬람’이라는 관념의 총체상은 지속되었다. 이 ‘중세적인 편견’이 지금도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지배적으로 돌출하는 것이다.
18페이지: 유럽은 중심이었다. 옛 지도는 이 유럽을 중심에 두고 나머지 대륙을 배치한다. 왜 ‘동양’인가? 유럽의 ‘동쪽’에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유럽은 이슬람을 이해하고자 했고, 이것이 오리엔탈리즘의 두 번째 시기를 이룬다. 유럽은 확장을 계속했고, 무역, 식민지 개척이 활발했다.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한 것은 제국주의였고 이는 자인종중심주의, 자기가 더 우월하다는 태도였다. 이를 바탕에 둔 이상 남을 지배하는 행위는 “신성한 권리”로서 인식되었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지배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근대화는 대게 이 자기우월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가령 싱가포르나 홍콩은 동양에서 자기들이 가장 근대화되어 있다고 믿기에 우월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일본 만 엥짜리에 나와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론을 확립시킨 사람인데, 그는 “일본은 이 아시아라는 슬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서양(미국)을 바라봐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는 백인만이 근대성과 문명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서구 전체가 가치 하락했고, 그 역사적인 존엄을 박탈당한 채 단순한 인종학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시작은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특정한 기술(記述)로부터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인 것이다. 인류학은 식민주의적인 학문으로서 영국이 인도 원주민을 이해하려는 욕구에서 발달한 학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1835?1901):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 도쿠가와(德川)시대와 메이지(明治)시대를 살면서 근대 일본을 건설했다. 일본 양대 사학 중 하나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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