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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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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여, 버마혁명의 배신자여
그대여, 버마혁명의 배신자여

해방군 형제 버리고 버마정부군과 손잡은 민주카렌불교도군의 칫투 사령관 민주항쟁 17돌을 맞아 베일에 가려 있던 반혁명 수장을 만나다

▣ 완카= 글 ·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전선기자에게 적진은 없다.”
옳다. 전선기자의 ‘중립성’을 강조한 이 고전은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근데 이 말은 때때로 전선기자를 ‘골빈 놈’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중립성으로 무장한 공룡자본 언론이 저지르는 온갖 왜곡과 거짓말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게다가 민주시민을 대량 학살하고 정권을 탈취한 무장 군사정권이 취재 대상이라고 한다면, 더하여 그 군사정권이 “짖는 개를 반드시 해치우겠다”고 전선을 뛰는 기자를 협박해온 경우라면, 미안하게도 중립성 따위는 비평가들의 밥벌이 도구쯤이 되고 만다. 하여 나는 적어도 버마 전선에서만은 시민사회의 뒤통수를 치는 배반 행위가 될 수도 있는 중립성이라는 화두를 꺼내본 적이 없다.

‘짖는 개’에게 취재 허가가 떨어지다

△ 민주카렌불교도군 특수대대 사령관 칫투 대령. 그는 형제들을 버리고 버마정부군과 손잡았다.

그사이 어언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8년 민주항쟁이 남긴 유산을 모조리 까먹어버린 채 방황하는 버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그 버마 상황처럼 모에이(Moei)강도 남실남실 잔물결만 흘릴 뿐, 아무 말이 없다. 손을 담가봐도 짱돌을 던져봐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그녀 품에 안겨 멱을 감았든, 무심한 모에이는 이제 그날 그 혁명의 강이 아니었다. 그 모에이가 휘감아도는 물돌이동 완카(Wanka) 기지. 1988년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이 처음 깃발을 올렸던 곳으로, 또 1990년대 카렌민족해방군(KNLA)과 버마민주동맹군(DAB)의 난공불락 요새로 세계 게릴라 전사에 가장 치열한 전투 기록을 남긴 완카도 이제 영광의 땅이 아니었다.

그리고 완카를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은 그 덧없는 세월 앞에 우두커니 선 내 기억 속의 1995년 2월20일을 사정없이 파헤쳐냈다. 불바다를 휘감아오르는 시꺼먼 포연에 가려 마지막 가쁜 숨을 헐떡이던 완카 기지를 코앞에 두고 타이 국경수비대에 걸려 모에이강을 건너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른 실패한 전선기자였던 내게, 꼭 10년 만에 다시 나타난 풍경들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건 1990년대 초부터 완카를 취재한 유일한 기자로서 완카의 최후를 함께하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날, 낮과 밤 사이 경계를 없애버린 짙은 포연을 뚫고 어렴풋이 버마 정부군 깃발이 오르고부터 완카는 ‘적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모에이는 지난 10년 동안 건널 수 없는 강으로, 완카는 디딜 수 없는 땅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적진은 전선기자들에게 버림받고, 또 전선기자를 배척하며 지난 10년 동안 금역으로 남아 있었다.

사실은 버마 정부군과 손잡고 완카를 장악한 민주카렌불교도군을 통해 그동안 나는 ‘중립성’을 강조하며 그 적진 취재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지만, 이미 ‘짖는 개’로 찍혀버린 내게 완카의 문은 호락호락 열리지 않았다. 하여 완카에 대한 미련도 민주카렌불교도군에 대한 취재도 모두 접어버린 어느 날, 느닷없이 ‘적’의 마음이 변했는지 ‘취재 허가’가 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10년 만에 최초로 적진 완카에 발을 들여놓는 기자로서 나는 마치 ‘척후병’ 같은 심정을 들고 갔다.

정규군 특수부대 뺨치는 수준의 화력

모에이강을 건너 안내병을 따라 완카 사령부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이 손을 꽉 잡았다.

“아니, 자네가… 마너플라우에서 만났던 그, 그….”

카렌민족해방군이 버마 정부군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던 1990년대 초, 해방구였던 마너플라우(Manerplaw)에서 ‘나는 전선기자로 너는 해방전사로’ 함께 전선에 갔던 그이를 십수년이 지난 뒤 ‘적장’으로 다시 만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스무살이 갓 넘은 앳된 얼굴이었던 그 전사는 어느덧 민주카렌불교도군 핵심 전력인 최정예 특수대대 1천여명을 이끌며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칫투 대령(Col. Chit Thu)으로 변해 있었다.

△ 버마전선에서 최대화력을 갖춘 민주카렌불교도군 특수대대는 추후 국경 정치판도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칫투대령(오른쪽에서 세번째)과 특수대대 요원들.

전선 회상은 이내 세월을 뛰어넘었고, 마음을 연 칫투 대령은 예민한 정치적 사안까지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나절 칫투 대령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일찌감치 민주카렌불교도군의 ‘차기’를 주저 없이 그이라고 꼽을 만한 단서들을 발견했다. 민주카렌불교도군 편제를 볼 때, 칫투 대령이 이끄는 특수대대는 최대 전략요충지 완카를 낀 최고 화력을 지닌 부대일 뿐 아니라, 국경 밀무역 중심지로서 민주카렌불교도군의 물적 토대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칫투 대령은 이미 자력으로 타이 국경-모에이강-완카-파안을 잇는 4차선 도로를 닦음으로써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한 상태였다.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건 칫투 대령이 이끄는 특수대대의 정교하고 강력한 화력인데,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게릴라전선에서도 그만한 화력을 본 적이 없다. 미군이 사막전에 사용해온 위장복과 철모를 기본으로 각종 중화기에다 야간경과 저격용 장비까지 갖춘 특수대대 병력들은, 그야말로 정규군 특수부대를 뺨치는 수준이었다. 그런 무장은 민주카렌불교도군의 뒷심이 돼온 버마 정부군마저 꿈꿀 수 없는 수준이었다. 칫투 대령은 그저 ‘수입품’이라고만 웃어넘긴다. 물론, 그건 타이군을 통한 ‘밀수’라는 뜻이고. 자신감에 찬 칫투 대령은 화제를 민주카렌불교도군과 카렌민족해방군 통일로 끌고 갔다.

“두쪽 젊은이들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통일이 모두의 바람이다. 양쪽 젊은 지휘관들끼리는 자주 만나왔다. 양쪽 노장들이 가고 나면 쉽게 통일할 수 있으리라 본다.”

칫투 대령은 상종할 수 있는 상대방 지휘관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카렌 통일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한번 열린 그이 입에서는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풀려나왔다. “우리에게 영웅인 카렌민족해방군 최고사령관 보먀(Bo Mya) 장군을 난 여전히 존경하고 있다. 우리 지도자 우 투 자나(U Thu Zana)와 함께 보먀 장군을 최근 두번 만났다.”

그동안 국경에선 간간이 두 진영의 통합 문제가 소문을 탔지만, 당사자의 입을 통해 구체적인 상대 이름까지 확인된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보먀 장군과 우 투 자나의 만남은 소문조차 난 적 없는 가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카렌민족해방군과 민주카렌불교도군은 한 핏줄끼리 서로 ‘형제 살해극’을 벌이며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로만 여겨왔던지라, 두 지도자의 만남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해방군이 우리 쪽으로 흡수되는 게 당연”

칫투 대령은 버마 정부군과의 관계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우리가 버마 정부군과 협력해온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카렌 해방을 포기한 적은 결코 없다. 상황이 바뀌고 때가 오면 버마 정부군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이건 버마 정부군과 민주카렌불교도군으로부터 협공을 당해왔던 카렌민족해방군이나 민주혁명 진영에서 듣자면, 기막힌 말이 아닐 수 없다.

“버마 정부와의 관계가 그리 순탄치는 않다. 그쪽이 경제적인 부분은 독립성을 인정하지만, 군사적으로는 우리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건 또, 민주카렌불교도군 지도부 가운데 버마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공개적으로 시인한 최초의 발언이었다. 비록 국경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긴 했어도.

말문이 열린 칫투 대령은 거침없는 의지를 내뿜었다. “정부가 우리한테 총을 내리라고 강요한다면, 우린 총부리를 그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카렌의 통일 문제가 당장 현실로 다가온 느낌을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군사와 경제력 어디로 보나 카렌민족해방군이 우리 쪽으로 흡수되는 게 유일한 길이다.” 잘나가던 칫투 대령이 통일 가능성에 ‘염산’을 퍼붓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이는 카렌민족해방군 일부 전사들이 민주카렌불교도군으로 넘어온 일들을 지나치게 해석한 낌새를 풍겼다.

현재 카렌민족해방군은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지만, 지난 60년 동안 세계 최장기 투쟁 기록을 세우며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어온 역사성을 나라 안팎에서 인정받고 있다. 더구나 카렌민족해방군이 지닌 정치적 상징성이 버마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의 사활을 가르는 버팀목 노릇을 해온 현실을 본다면, 민주카렌불교도군이 통일 조건으로 내세운 ‘물리적’ 우세는 국경의 농담거리가 되고 마는 수준이다.

“미친놈들 아냐! 통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렇지, 무슨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카렌민족해방군 상위 정치조직인 카렌민족연합(KNU) 사무총장 만샤르(Mahn Shar)가 단박에 민주카렌불교도군의 흡수통일 조건을 부정했듯이.

△ 완카 카렌해방군 공동묘지. 민주카렌불교도군은 이 비극의 현장에 카렌민족해방군 전사자들을 함께 안장해놓았다.

이렇듯 국경의 현실은 두 카렌의 통일이 아직도 많은 시간과 결정적인 동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지난 17년간 국경을 배회한 내 눈에 보이는 카렌 통일의 길은 오직 하나다. 그건 상호 불신감과 분열 책임을 지닌 현 지도부 세대가 모두 물러나고, 민주카렌불교도군이 버마 정부군과 손을 끊는 길뿐이다. 그 길목은, 카렌 통일이 세력을 키우는 증축의 문제가 아니라, 공멸을 면키 위한 자구책이라는 처절한 현실 인식과 맞닿아 있다.

맥빠진 버마 혁명전선의 슬픈 상징

어쨌든 버마 정부군이 하루 수천발의 포탄을 퍼부어대는 통에 모든 생명체가 땅 속으로 내려갔던 완카에도 지금 어수룩한 평화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특히 물돌이동 윗목에 해당하는 신완카 지역 슈에 코욱 쿠(Shwe Kouk Ku)는 상당한 활기가 느껴졌다. 민주카렌불교도군 특수대대 본부를 끼고 7천여명의 카렌 주민들이 살고 있는 슈에 코욱 쿠는 시장과 군사훈련장 학교와 군용병원이 어지럽게 뒤섞인 혁명 지역의 전형적인 군민 합동 마을 모습을 드러냈다. 슈에 코욱 쿠 사람들은 자유로운 세상을 한껏 누렸고, 그 살림살이는 여느 국경 카렌 마을들과는 달리 기름졌다.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 불교 사찰 두개와 기독교 교회 하나를 조화롭게 배치한 민주카렌불교도군은 자신들의 출생 배경이자 멍에인 ‘종교적 분열’을 치유하는 데 힘을 쏟고 있음을 과시했다. 그렇게 지난 10년 동안 민주카렌불교도군은 형제를 버리고 적과 의형제를 맺은 대가로 많은 것을 얻었음이 드러났다.

△ 구완카지역 민주카렌불교도군 특수대대 본부 들머리(왼쪽). 칫투대령이 이끄는 민주카렌불교도군 특수대대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모에이강 물돌이동 완카와 타이 국경 완카를 잇는 교량건설 공사를 준비하고 있다(오른쪽).

그러나 민주카렌불교도군은 여전히 국경 해방·혁명전선의 ‘적’으로 규정돼 있다. 국경에서 그들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이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동지’란 뜻은 결코 아니다. 민주카렌불교도군은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과 ‘동지’를 처음부터 분간하지 못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완카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무너진다”는 혁명사의 고질적인 전통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 채, 적전 분열을 통해 형제 살해의 비극을 낳고는 오늘날 맥 빠진 버마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의 슬픈 상징으로 남아 있다.

‘불교도 반란’은 왜 일어났나

소수 기독교도가 장악한 카렌민족해방군 지도부의 독선적 운영이 화를 불러 버마정부군이 코앞까지 치고 든 1994년 말, 카렌민족해방군(KNLA)의 본부이자 버마 내 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의 해방구였던 마너플라우에는 ’불교도 반란’ 소문이 어지럽게 나돌았다. 심각성을 느낀 각 혁명단체는 초동 단계 대응을 요구했으나, 카렌민족해방군 지도부는 꿈쩍도 않았다.

12월3일,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최고 전략 요충지이자 보급선이 걸린 살윈강과 모에이강 합류지점에서 카렌민족해방군 1여단, 6여단, 7여단 그리고 19대대, 21대대, 24대대 소속 불교도 전사 18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전이 날아든 것이다. 이틀 뒤, 승려 우투짜나(U Thu Zana)를 지도자로 내세운 판위 대위(Panwe)와 조탄 상사(Kyaw Than)가 이끄는 불교도 반란군은 무려 1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반란군은 공식적으로 민주카렌불교도군(DKBA)의 이름을 내걸고 “이권과 조직을 독점한 카렌민족연합 지도부의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정치를 거부하며 평화를 바라는 카렌 주민들의 열망에 따라 새로운 조직을 건설했다”는 성명서를 날렸다.

돌이켜보면, 소수 기독교도가 지도부를 장악한 카렌민족해방군 내부에서는 1988년 이전부터 다수인 불교도들의 불만이 쌓여왔다. 그러나 기독교 중심주의에 빠진 지도부는 불교도를 무시한 채 독선적 운영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국 카렌민주해방군을 이탈한 민주카렌불교도군은 1995년 1월26일 버마정부군으로부터 막강한 화력 지원을 받으며 마너플라우를 점령했다. 해방구 마너플라우가 무너진 혁명전선은 2월16일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다웅윈본부에 이어 2월20일 난공불락 요새로 불렸던 카렌민족해방군 완카기지까지 줄줄이 무너지면서 결국 버마혁명사도 어두운 뒤안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해방구를 잃은 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승려 우투짜나를 지도자로 내세운 민주카렌불교도군은 파안(Pa-an)에서 70km 떨어진 미아잉지우(Myaing Gyi Ngoo)에 본부를 두고 버마정부군 관할 아래 버마-타이 국경 일대를 비롯한 일부 카렌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군사적으로는 최고사령관 옹 응웨(Aung Ngwe) 준장이 333, 555, 777, 999 네 개 여단조직 약 1만여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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